캄보디아 봉제공 여성들의 커피
2023년 12월 05일콜롬비아 고산지대 커피농장 ©2017 The New York Times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8)
세계적으로 커피가 생산되는 곳은 열대와 아열대 지역으로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70여개 나라가 커피 벨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커피의 ‘25/25존(zone)’으로 불리는 북위 25도에서 남위 25도 사이, 이곳은 모두 1,000m가 넘어가는 열대 우림과 산악 고원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16세기 중반, 유럽에 카페 문화가 형성되고 17세기 말에 커피의 수요가 급증했을 때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식민지에 대규모 커피농장들이 개척됩니다.
커피는 첫 수확을 얻기까지 4년이 걸립니다. 서구의 개척민들조차 쉽게 들어갈 수 없던 고산지대에는 ‘부르심의 땅 끝’으로 소명을 받고, 복음을 전하고자 들어간 선교사들에 의해 커피씨앗이 전해지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와이 ‘코나 커피’ 입니다. 흔히 세계 3대 커피로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과 하와이의 ‘코나’ 그리고 예멘의 ‘모카’커피를 꼽습니다. 그 중에서 코나 커피의 탄생은 흥미롭습니다.
하와이는 어디든지 주요 소득 작물인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을 심습니다. 그러나 코나 지역은 대량 경작이 어려운 지형이고, 커피나무 또한 좋은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 낮은 해발 335m에 불과합니다.
1828년 7월, 미국 선교사 새뮤얼 러글스(Samuel B. Ruggles) 목사는 ‘코나’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커피나무를 옮겨 심게 됩니다. (당시 하와이로 들여온 브라질 커피나무는 관상수로조차 인기가 없어서 심은 것도 뽑혀져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1829년에는 요셉 굿리치(Joseph Goodrich) 목사가 선교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코나에 커피나무를 심고, 12년 동안 원주민 문맹퇴치를 위해 글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코나 커피의 시작인 것입니다.
1857년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베트남 북부 ‘하남’고지대의 교회마당에 아라비카 품종을 심었습니다.
1873년에는 쓸모없던 땅 ‘코나’에서 재배된 커피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코나’의 척박한 환경으로 커피나무를 옮겨 심은 것은 새뮤얼 러글스 선교사이지만 ‘코나 커피’로 거듭나게 만든 것은 사업가 헨리 니콜라스 그린웰(Henry Nicholas Greenwell)입니다
그는 1873년 비엔나 세계박람회에 ‘코나’라는 이름으로 하와이 원주민들이 생산한 커피를 출품하고 우수상을 수상합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코나 커피가 바다 건너 널리 알려지고 명성을 얻게 된 것입니다
1885년에는 미얀마 카렌부족에 의해 커피 재배가 시작됐습니다. 1898년에는 독일 선교사가 탄자니아에 복음을 전하면서 커피나무를 심게 되고, 오늘날 유명한 ‘킬리만자로 커피’가 탄생하게 됩니다.
1900년 초에는 태국 오지에 커피 재배가 시작되고, 1915년에는 라오스 산간마을에 커피나무가 심어 졌습니다. 커피가 외부 세계와 산악부족의 연결 통로이며 소득원이 되어줍니다.
1928년에는 800개 부족언어를 사용하던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에게 커피 재배방법이 전해지고, 1939년 루터교 선교사에 의해 고원지대에 커피생두 건조시설이 세워졌습니다.
1960년에는 캄보디아 프농족 산지에도 커피나무가 심어집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선교사들이 교회를 개척하며, 소수부족의 커피 수확과 판로 개척을 돕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커피 한잔’ 브랜드 배경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친 선교사들의 헌신과 믿음과 그 땅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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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나무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널리 퍼져 나가던 19세기 초 한반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당시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의 폐해로 기근이 만연했을 때입니다.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에서 의료사역을 하던 미국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은 고향 미주리주에서 사과나무 묘목 72주를 들여와 사택 뜰에 심습니다. 이것이 모판이 되어 대구를 상징하며 중요한 경제작물이 된 사과는 1960년대 초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게 되지요. 이처럼 선교사에 의해 서양의 척박한 고산지대에는 커피나무가, 우리 땅에는 사과나무가 전해졌습니다.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고원지대에는 아라비카 커피가 재배됩니다. 이곳 원주민의 주식인 감자가 유럽을 거쳐 한반도에도 전해지게 됩니다. 1832년(순조 32년) 7월,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칼 귀츨라프(K.F. Gutzlaff) 선교사는 영국 동인도회사 상선 암허스트호(Lord Amherst) 통역으로 지금의 충남 고대도에 상륙합니다. 조선 조정의 통상거부로 20일만에 쫓겨나듯 떠나게 되지만, 그사이 섬사람들을 위해서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어주고 재배법과 주기도문을 한문 필담으로 가르칩니다. 풍부한 영양과 대량 수확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감자는 이렇게 선교사에 의해서 최초로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카페마다 빠지지 않는 인기 레시피 중에 ‘딸기라떼’가 있습니다. 딸기는 1905년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재배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전주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 선교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들여온 딸기 종자를 전주 화산동에 심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커피나무와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우리에게 전해진 감자와 사과와 딸기를 만나게 됩니다.
카메룬은 ‘커피나무의 고향’이지만, 근대 커피 재배는 독일 식민지 시대인 18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 선교사들에 의해 커피나무가 보급되었는데, 특히 1841년부터 1886년까지 카메룬 해안을 따라 진행된 침례교 선교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 연대기에 기록된 두 명의 개척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조셉 메릭(Joseph Merrick)과 알프레드 세이커(Alfred Saker) 영국 선교사입니다. 이들은 (특히 세이커 선교사)는 빵과일, 망고, 오렌지 과일과 채소 등 다양한 식물을 도입하여 원주민 개종자들에게 규칙적인 노동을 통한 수입을 얻도록 유도했으며 신발 제작 같은 산업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이렇듯 카메룬의 커피 역사에는 일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교회의 역할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후,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블루마운틴 커피는 1931년 자메이카에서 수입하여 재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732년에는 베네수엘라 예수회 소속 호세 구 밀라((José Gumilla) 선교사가 안데스 산맥의 해발 1천미터가 넘는 프레몬탄 샨카 지역 원주민에게 커피씨앗을 전합니다. (이후, 유럽 농민들도 이주를 꺼리던 이곳에서 커피가 재배되면서 당시 노예 노동에 익숙했던 안데스와 콜롬비아 출신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착하게 되고 커피 생산에 적합한 중간 경사지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개발해냅니다)
1740년, 호세 안토니오 모헤다노(José Antonio Mohedano) 스페인 선교사가 필리핀으로 커피씨앗을 전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라비카 콩 3간타(약 2kg)를 인도네시아 섬 ‘자바’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시초가 되어 오늘날 필리핀은 세계 최고의 스페셜티 커피 생산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알프레드 리에타르(Alfred Lietard)는 보이차의 고향으로 불리는 중국 윈남성 빈촨현 산골 주쿨라(朱苦拉, Zhukula) 마을 교회 근처에 커피나무 묘목을 심습니다. 이곳은 해발 1,500m의 고원지대로 기후와 토양 등 커피 성장에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소수부족 원주민들에게 커피 재배와 마시는 방법을 가르쳤고, 원주민들은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매일 아침 일어나면 호두 몇 개와 직접 만든 커피 한 그릇이 간단한 아침 식사가 되었습니다. 주쿨라 마을에서는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커피를 마시는 것은 다른 중국인들이 차를 즐겨 마시는 것처럼 삶의 습관이 됐습니다. 130여년전 선교사에 의해 중국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작고 보잘것없는 소수부족 마을에 전해진 커피는 이렇듯 원주민의 삶을 바꾸고 지역경제를 살리며 중국을 대표하는 커피 브랜드가 됐습니다. 중국 커피의 역사를 만든 프랑스 선교사를 마을사람들은 천덕능(田德能, Tian De Neng)이란 원주민 이름으로 부릅니다. (2024년 현재 이 지역에는 스타벅스, 네슬레, 맥스웰하우스 등 세계적인 커피회사들의 연구소와 농장이 있으며 계속해서 커피생산을 크게 늘리고 있습니다)
1893년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한 프랑스 선교사 에밀 알리게이어(Emile August Allgeyer) 일행은 자급자족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모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에 해발 1,660m에 이르는 정착지에 텃밭을 개척하여 아스파라거스와 프랑스산 콩을 비롯해서 브라질에서 들여온 커피나무 1천그루를 심었습니다. 1904년에는 선교사들이 수확한 커피가 나이로비농업전시회(Nairobi Agricultural Show)에서 1등상을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커피 재배에 조언을 구하고, 씨앗을 사고 싶어 찾아옵니다. 이처럼 케냐 커피산업은 선교사들의 자립을 위한 기도와 헌신으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그때 선교사들이 키운 나무를 나이로비 “커피나무의 어머니”(Mother of the Coffee Tree)로 부릅니다.
1893년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아라비카 커피나무를 케냐로 처음 들여와서 원주민에게 재배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1895년 영국이 케냐를 식민지화한 후에는 백인 정착민들이 커피를 포함한 특정 작물을 재배하도록 선언하고, 케냐 원주민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커피 식민지 역사속에 선교사에 의해 키워진 케냐 커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케냐는 2023년 현재 아프리카 최대의 커피 생산국으로 커피산업은 국가 경제에 중요합니다. 케냐 커피는 케냐 수출 수익의 약 20%를 차지하며, 세 번째로 큰 수출 상품입니다)
1838년부터 1843년까지 칠레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복음을 전했던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앨런 가디너 (Allen Gardiner)는 1851년 9월에 6명의 동료 선교사와 남미 남단의 파타고니아 섬들을 탐사하던 중에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원주민들에게 쫓겨 혹독한 기후의 불모지에 고립됐습니다. 식량을 비롯해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은 약탈당하고… 영국으로부터의 약속된 재보급선이 6개월 늦게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두 기아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후방 지원에만 의존하는 선교전략에서 자립선교로 전환이 요구됩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며 원주민 접촉점으로 동시에 소득원으로 커피나무를 심은 것은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남미의 원주민 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다 목숨을 바친 앨런 가드너와 여섯 명의 동료들…어떤 상황에서도 뿌려진 씨앗은 싹이 트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그의 순교이후 칠레 군도의 한 섬은 가디너(Gardiner)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영국 교회 달력에는 9월6일을 앨런 가드너 추모식으로 기록됩니다. 그가 속했던 파타고니아 선교협회(Patagonia Missionary Society)로 후원금이 모이고, 1854년에 그의 이름을 딴 88톤급 스쿠너(Schooner) 범선 앨런 가디너(Allen Gardiner)호가 건조되어 영국 선교선으로 파타고니아에 파견되었습니다.
무명의 선교사 앨런 가디너(Allen Gardiner)의 이름으로 영국 선교선이 출항한 1854년은 특별히 기억되는 해입니다. 1854년 그 해에 세 명의 선교사가 근대 선교 역사를 뿌리째 뒤흔드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1854년에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선교사는 중국에 도착했고, 이후 중국내지선교회를 세웠으며, 현지인과 동일한 복장에 변발을 하고 그들의 삶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의 정책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마지막때까지 중국 전역에 20개의 선교지를 설립했고, 8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125,000명의 영혼을 가진 중국교회의 성장을 감독했습니다)
1854년은 특히 공장이 탄생하고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는 산업혁명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의 번영은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1854년에 찰스 스펀전(Charles H. Spurgeon)이 런던 파크 스트리트 교회(London’s Park Street Chapel) 목사가 됐을 때, 급진적 개혁주의자이며 교회와 사회 관계인식은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자인 그의 설교를 듣고자 모인 회중은 처음 80명에서 5,000명, 그 다음에는 12,000명(1856), 그 다음에는 23,654명으로 증가했습니다(1857). 이처럼 스퍼전의 설교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회심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는데 후대에 사람들은 그를 “설교자의 왕”으로 부르게 됩니다.
1854년에 런던 선교대회(London Missionary Conference)가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변혁적인 시대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설교가 찰스 스펀전(Charles H. Spurgeon) 목사의 설교와 교회의 부흥, 그리고 중국에서 현지인과 같은 복장에 머리는 변발하고 그들의 삶속에서 함께 살아간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선교사의 사역 방식 등이 대비되며 단연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 선교단체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 불렀습니다. 당연히 선교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본국에서 지원을 받아 사역하는 것으로 익숙해져 있었기에, 앨런 가디너(Allen Gardiner) 선교 팀과 같은 사례가 발생하게 됩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경우 현지 대처가 안되고 지속되는 영양부족의 기아 상태에서 아사(starvation)한 것입니다. 아사는 굶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1854년 당시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 CMS) 총무로 13년째 사역하고 있던 헨리 벤(Henry Venn)은 CMS소속 선교사107명과 정기적인 서신과 보고서를 주고받으며 현지에서 본국으로 정책을 상정하여 논하는 형태를 구상했습니다. 그는 선교사 위주의 교회와 선교사가 주도하는 교회들의 단점을 통찰하고 선교행정가로서 정립한, 선교지에서의 토착교회 개척을 위한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자립적이고(Self-supporting) 둘째, 자치적이며(Self-governing) 셋째, 자전하는(Self-propagating)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습니다. (1854년 해외선교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자립’을 다룬 것은 필요의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 방식과 극한 상황에서 본국 후원없이 고립되었을 때 아사해버린 앨런 가디너의 경우 또한 전략 수립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1854년에 헨리 벤(Henry Venn)이 발표한 선교지 토착교회 개척 전략은 선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 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이나 식민주의 의식(colonial complex)을 고려해볼 때 헨리 벤의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해외선교협의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 ABCFM) 총무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의 주장과도 일치하여 연합하게 되고, 중국에서 사역하며 현지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전략’을 찾아 갈급해 하던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선교사에 의해 1855년 삼자(三自)정책으로 정립되고 그 적용 사례를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The 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으로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발표합니다. 그는 1890년 6월에 조선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 초청으로 방문하여 2주 동안 선교사들과 사경회를 갖고 자신의 선교경험과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조선 교회 삼자원칙(Three-Self of Church)으로 전파됩니다. (이후 네비우스 선교사는 1887년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예수셩교젼셔》총 8권을 간행한 존로스(John Ross)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1893년 장로교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에서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은 존로스의 토착선교이론에 입각한 삼자원리가 상당 부분 반영된 10가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상황은 어땠을까요?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1861년(철종 12년)에는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서 커피 원두가 들어오고, 1884년 1월에는 외국인과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던 ‘석식 후 커피(after-dinner coffee)’를 마셨다”는 새로운 문화 접촉이 있었습니다. 1889년 3월에는 미국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부부의 커피 교제와 1890년 6월에 네비우스 삼자정책이 선교사들에게 전수되고, 1893년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에 처음으로 태극기와 ‘KOREA’ 라는 국호로 참가를 하여 세상에 조선이 소개됩니다. 1894년에는 봉건 시대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폐지하려는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변혁 운동’인 동학 혁명이 일어났지만 좌초되고 맙니다. 반대로 1895년에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내려지고… 외세(일본)와 결탁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됩니다. 조선은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1894년 조선에 와서 경복궁에서 명성왕후를 만난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여사는 오후에 궁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정중히 대접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무참히 시해되고… 1896년 2월, 고종 황제는 왕세자(순종)와 비밀리에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여 머물며 외국 공사들과 커피를 마신 기록이 있습니다. 커피는 왕후와의 격조 있는 교제의 자리에도, 나약한 황제의 슬픔에 찬 자리에도…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고,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이 사용됩니다. 이어서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조선 왕조 체제가 해체된 후 10월12일에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쳤습니다. 외세의 힘에 휘둘리던 격동의 시대입니다. 1893년에 미국/호주/캐나다 장로교선교사가 중심이 된 조선 장로교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는 네비우스 삼자원칙에 기반한 10개의 선교방법론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확정했습니다. 여기서 삼자원칙은 첫째, 자립(Self-supporting : 외국(선교사) 으로부터 경제독립. 조선 기독교 성도는 조선인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비를 책임진다) 둘째, 자전(Self-propagation : 조선 기독교인은 스스로 전도하여 선교 사명을 감당한다) 셋째, 자치(Self-governing : 조선인 성도 자신들의 교회 문제를 스스로 처리한다) 식민지 약소국 약소민족의 열망과 선교의 자주성이 만납니다.
1893년(고종 30년)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조선 ‘장로교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소속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선교사를 초청하여 들었던 조언에 따라, 조선의 서민층을 우선적으로 전도하고,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을 설립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조선인 스스로 자립 전도하는 선교활동에 중점을 둡니다. 이후 조선 서민층을 중심으로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던 당시 시대 상황에는 조선의 노비제도가 있습니다. 1801년(순조 1년)엔 중앙 관서의 공노비가 해방됐고, 1886년(고종23년)엔 노비세습제가, 1894년(고종 31년)에는 갑오경장 개혁운동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는 노비제가 사라지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 폐습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1890년(고종 27년) 3월 14일에 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가 파리의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조선 노비제도에 관한 보고’ (Commissariat du Gouvernement Français en Corée)를 살펴봅니다. “조선 각지에 주기적으로 가뭄이 발생할 때 대규모로 여자와 여자아이들의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남편이나 부모들은, 약간의 쌀이나 엽전 몇 푼에 타인에게 넘깁니다. 이런 경우에 통상적으로 여자아이들이 6~8프랑에 거래되지만, 종종 더 비싸게 팔리곤 합니다. 노예상인들은 이들을 싼 값에 인도 받아, 한양이나 큰 고을로 데리고 가, 큰 이익(200~300프랑)을 남기고 되팝니다.” (2024년 현재 시세로 계산하면 어린아이 몸값이 9300원~12400원, 다시 되 팔 때는 31만원~ 46만5천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조선은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노비제를 운용한 나라입니다.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동족을 19세기까지 노비로 세습시켰다는 점 때문입니다. 조선의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韓明澮)는 “중앙 관서의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까지 있었습니다.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1690년(숙종16년) 대구의 경우 인구의 43.1%가 노비였으며, 1858년(철종9년)에 호적상으로 양반의 90%가 노비를 가지고 있었고, 노비 인구도 아직 전체의 31.3%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노비제도가 쉽게 폐지될 수는 없었다. 특히 가사노동에 사역되는 여자 종(비) 수요는 계속되었고 남자 종(노)보다 가격도 비쌌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조선시대 노비의 수요와 공급,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김재호 교수. 2014.06)
한국학의 대부로 추앙받는 제임스 팔레 (James B. Palais) 미국 워싱턴대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Slavery Society)”라고 주장했습니다. 학자로서 그의 발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경제적 번영은 대규모 노예집단에 의해서 였으며, 로마제국은 인구 750만명에 노예가 300만명을 넘었습니다. 상위 5% 인구가 100만명의 노예를 소유했을 정도로 전형적인 노예제 국가였습니다. 근대 국가의 노예제 사회로, 1800년 노동집약 농업 중심의 브라질(33%), 1820년 미국 남부(33%), 1861년 쿠바(30%)를 비롯해서 1905년 태국 왕국은 전체 인구의 1/3을 노예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33%).
1662년에서 1807년 사이에 영국과 영국 식민지 선박은 약 341만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구입했으며, 런던은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의 최대 중심지였습니다. 이와 같은 노예 무역을 1833년(순조 33년) 법으로 폐지시킨 복음주의 사회변혁가 그룹이 있습니다(Clapham Saints). 그들의 영적 지도자가 헨리 벤(Henry Venn)으로 그는 1854년(철종 5년) 영국교회선교회(CMS) 총무이며 선교행정가로서 선교의 획기적인 삼자정책을 주창했고,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선교사를 통해 조선에까지 전파됩니다. 삼자정책이 전해진 1890년(고종 27년)은 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가 본국 정부에 조선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과 성인 여성들을 팔고 사는’ 노비제도에 관한 보고를 드린 해이기도 합니다.
다시 1890년 조선으로 돌아와 봅니다. 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는 여성 노비들의 비참함을 본국에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들의 조건이 처참하다고 하지만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 소속된 여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이며 이들에 대한 멸시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노비가 생기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기생들은 관리의 명령으로 지방 관아의 노비가 됩니다. 그러면 아문 관리들의 소유가 되며 허드레 일을 하게 됩니다. 역모자의 부인들의 경우입니다. 대역죄가 발각되면 가담자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딸과 부인은 조정이나 지방 관아의 노비가 됩니다.”
“조선 노비제의 가혹함은 노비의 이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돌쇠(乭金)나 마당쇠(馬堂金), 방자(房子) 등 널리 알려진 사내종의 이름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삼월(三月)이나 구월(九月이), 막동(莫同)이나 끝동(末叱同)처럼 태어난 달이나 순서에 따라 붙인 이름은 그나마 좋다. 더부사리(多夫沙里), 담사리(淡沙里) 등 빈한 처지를 노골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은 평생 종으로 더불어 살거나 담장 아래 붙어 살라는 주문(呪文) 같다. 곱단(古邑丹), 넙덕(汝邑德), 작은년(自斤連), 어린년(於仁連) 등처럼 외모 특성을 딴 이름은 여성을 노리개 삼는 문화를 보여준다.”
“조선의 노비제는 긴 세월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온 멀쩡한 이웃 사람들을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천민으로 전락시킨 부조리한 제도였다. 그러한 부조리를 은폐하기 위해서 양반은 노비에게 비천한 이름을 주고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이름을 부르며 호령했다. 방자, 향단이, 돌쇠, 마당쇠, 종말, 끝둥이, 삼월이, 사월이, 시월이, 황진이 등등 주인이 날마다 노비의 비천한 이름을 외치며 호령할 때 발생하는 커다란 사회적 효과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선 누구든 그러한 노비의 이름을 갖게 되면 한평생 노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한국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대번에 그들이 노비였음을 알아챌 수 있다.”
“노비의 비천한 이름은 노비를 노비로 만드는 브랜드-마크(brand-mark)였다. 동시에 노비의 뇌리에 노예 의식을 주입하고 노비의 몸뚱이에 노예적 근성을 심는 문화적 세뇌 장치였다. 조선 노비의 비천한 이름은 그들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노예의 표식이었다. 한평생 그런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3.11.25 발췌)
1894년(고종 31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요구하며 들불처럼 번졌던 동학민중혁명은 좌절됐으나, 그 여파로 갑오개혁에 의한 노비제도가 폐지됐습니다. 도망 중이던 노비이거나 관아의 기생 같은 노비들도 있고 대역죄로 노비가 된 한 맺힌 지식층 여성 등… 대부분의 노비는 해방됐지만, 실제로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양반집에 그대로 매인 채로 ‘새경’이라는 형태로 임금을 받는 머슴으로 전환되어 과거 했던 일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마을 같은 작은 사회에서 누가 ‘해방 노비’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기에 노예처럼 사는 신세는 여전했습니다. 즉 실질적인 노비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1894년(고종 31년) 노비제 폐지는 천지개벽이었습니다. 그간 극히 일부 계층에게만 미약하게 전해지던 ‘한글 성경’이 노비에게까지 폭넓게 보급되면서 천지가 뒤집어질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노비 출신인 자신들의 이야기가 성경 전체를 이루고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bondslave 주인의 노예)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이처럼 주인에게 순종하는 여종도 있고, “우리와 함께 종 된”(beloved bond-servant) 같은 처지의 ‘해방노예’(골1:7)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이었던 자신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free man)이 되지 않겠노라”(출21:5) 합니다. 그동안 잘 대해준 상전을 떠나지 않겠으며, 아직도 종의 신분인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만이 자유인이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평생노예’(출21:5)가 되겠다고 작정한 이들도 있습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에는 ‘노예’라는 단어가 124회 등장하지만 번역과정에서 종으로 대체되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왜곡됐다. 노예와 종의 의무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둘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종은 고용된 존재(머슴), 노예는 소유된 존재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마스터신학대학(The Master’s University) 총장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목사는 그의 저서 슬레이브(Slave)에서 성경시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재 ‘종’으로 번역된 것을 노예로 수정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NASB 번역본에는 모두 노예(slave)로, 오류가 된 곳은 하인(servant)으로 번역됐습니다. 창26:32 “이삭의 종”(Isaac’s servants), 마8:6 “내 하인”(my servant), 골1:7 “신실한 일꾼”(faithful servant)
1894년(고종31년)은 노비제가 폐지되고 언문(諺文)이 공문의 기본 글자로 선포된 해입니다. 1446년(세종28년)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조선에서 대부분의 공식 문자 생활은 한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글은 일반 백성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언문이라 불리며 안방 아녀자들이나 상민이나 사용하며, 상말이나 적는 저급한 글이라 천시되어 오던 한글이 국가가 인정하는 나라국문이 되어 450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문자로 쓰이게 됐습니다.
한글 성경이 보편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언문이 국가 언어로 공인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조선의 문화와 관습에서 바깥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안방의 여성들과 노비를 비롯해서 백정, 천민 등 최하층 신분의 여성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주며 쪽복음서를 소액에 제공해주던 ‘전도부인’(Bible Woman)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권서(勸書) 혹은 매서인(賣書人)으로 불렸습니다.
‘전도부인’(Bible Woman)은 당시 조선 사회의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글을 깨친 조선 여성들에게 성경과 단순한 교리를 가르쳐 배운 바를 또다른 조선 여성에게 전하게 한 것입니다. 선교사의 조력자로 전도사 역할을 한 ‘전도부인’들의 입교동기를 살펴보면 남편의 축첩이나 외도, 시집의 박대와 대부분 과부라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주변의 권고와 자발적 경우가 드물게 있었습니다.
그 시절 여성은 비천한 존재였습니다. 조선 시대 말(馬)값의 1/3 가격이 노비 몸값이던 때였습니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남의 집에 종이나 첩으로 팔려갔습니다. 이름도 없고 주체성도 없던 여성들에게 ‘전도부인’을 통해 복된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렙다 과부(눅4:26)와 나인성과부(눅7:11이하)같이 소외계층 여성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 마리아(눅8:2),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들(눅8:3)처럼 예수님은 여성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셨습니다. 세상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여인들을 구원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때로는 ‘여인 복음’으로 불리기도 하는 누가복음은 1882년 몽골과 조선 국경지역에서 사역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가『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로 최초 번역하여 출간했습니다)
1832년(순조32년) 황해도와 충남 고대도에 상륙한 귀츨라프(Karl Gutzlaff)선교사, 1866년(고종3년)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선교사로 인해 한문 성경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한문은 공적문서와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제한된 언어였습니다. 백성들의 언어인 언문(한글)은 성경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존로스(John Rosse)선교사는 그의 여동생 캐더린(Catherine)과 결혼한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선교사와 함께 1887년까지 조선의 각 지방 방언판까지 포함해서 59,000여권을 인쇄하여 매서인(賣書人)을 통해 보급했습니다.
모든 것이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존로스(John Rosse)선교사의 한글교사인 한약장수 ‘이응찬’을 비롯해서 의주사람 ‘백홍준’ 등 토박이 조선사람들이 제작에 참여한, 1881년 첫 한글번역《예수셩교문답》과 1882년 3월판《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는 한글 최초의 띄어쓰기와 함께 히브리어 “엘로힘”(Elohim)과 헬라어 “데오스”(Theos)를 각각 “하느님”과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후 한성(서울)철자법에 따라 1883년 10월판《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 1887년《예수셩교젼셔》에는 “하나님”으로 통일했습니다. (성경 제작은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의 중국 ‘문광서원’과 영국성서공회(BFBS)에서 지원)
미국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전도부인’과 어느 조선 여인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몇 달 전 여기에 왔을 때, 나는 내게 당신이 해준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당신이 내게 판 복음서를 읽어본 후 나는 너무나 관심이 생겨서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제발 앉아서 이 책의 가르침에 관해서 나에게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한국 전도부인과 그 사업(The Korean Bible Woman and her work), 한국선교(Korea Mission Field), 1935년 7월호.
많은 여성들이 ‘전도부인’과 만남으로써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전도부인’은 극도의 빈곤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여인들에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부유한 노인의 첩으로 살고 있던 여인들에게는 자유와 새 삶을 가져다줬습니다.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자살 직전의 여인을 구해주었고, 식구들이 기생으로 팔아 넘긴 작은 소녀는 ‘전도부인’한테 도망쳐와서 미션스쿨의 학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1885년 미국 여성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 파송으로 조선에 온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조선의 문화와 관습으로는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받을 수 없음을 알고 1886년에 ‘이화학당'(Pear Flowers School)을 세웁니다. 1888년 1월에는 자신의 집에서 ‘여성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시작했고, 이어서 3월 11일에는 21명의 조선 여성으로 최초의 ‘여성교회’(Women’s Church)를 설립합니다. 이 때 2명의 ‘전도부인’(Bible Women)이 세워져 이들이 한국의 첫 여교역자인 셈이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으며 ‘금쥐'(golden rat), ‘섭섭이'(sorrowful)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런 관습을 따라서 첫번째 ‘전도부인’은 ‘보배'(little treasure)로 이름 지어줬다고 합니다. 이 일은 흔치 않은 일인데 왜냐하면 소녀들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했고 보배가 아니라 짐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보배는 15세쯤에 김씨라고 하는 세금징수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부터는 아무도 ‘보배’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아기’ ‘저것’ ‘안사람’ 등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렸답니다. 그러다가 ‘수복’(Long Life and Blessings)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이가 태어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관습에 따라서 그녀를 ‘수복이 엄마’로 불렀답니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전도부인’의 등장은 189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조선 교회 초기 전도부인의 숫자를 담은 통계를 살펴보면, 전체 ‘전도부인’은 1215명이었습니다(감리교회 소속 717명, 장로교 209명, 성결교 138명, 기타 교단 151명). ‘전도부인’은 양반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성경과 찬송가, 전도책자들을 소액에 판매합니다. 이와 같은 매서(賣書) 혹은 권서(勸書) 활동은 대영성서공회(BFBS),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 그리고 미국성서공회(ABS)에 의해서도 추진되었고, 선교사들의 전도활동과 토착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는 ‘전도부인’들은 대부분 남편의 축첩이나 외도, 시집의 박대와 과부라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이었고, 그녀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일부 양반출신 ‘전도부인’들은 무료 봉사하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서양 선교사들은 외국의 선교기금과 성경보급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도부인’의 월급을 해결했습니다. 이 돈은 성경과 찬송가, 전도소책자 매서(賣書) 활동의 시간에 대한 수당으로, ‘전도부인’의 월급은 평균 7원(약 5달러)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시대는 조혼(早婚)이 성행했고 과부(寡婦)가 많았습니다. 외침과 역병으로 백성들의 평균수명은 30세 안팎, 조선 말인 1900년(대한제국 광무4년)초 집계된 평균수명은 36세였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수명은 평균 46.1세이고, 왕비는 51세, 후궁 57세, 양반가여성은 45.3세이나 그나마 53%가 50세 이전에 사망했습니다) 유교전통에 따라 자식이 제사를 모셔야 하고 대를 이어야 합니다. 1440년(세종 22년) 조혼 규정을 보면 남자는 16세, 여자는 14세이상이면 혼인할 수 있고, 예외적으로 부모 나이 50세가 넘으면 12세 자녀라도 관의 허락을 받아 혼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과부는 1894년(고종31년)에 비로소 재혼이 허용됐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유난히 과부가 많았던 ‘전도부인’의 월급은 부양 가족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1890년(고종27년) 6월에 네비우스 선교사가 조선으로 건너와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를 전했습니다. 그를 만난 7명의 선교사들은 모두 20대로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이라는 열정 이외는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게일(J. S. Gale)선교사 25세, 언더우드(H. G. Underwood)선교사 26세, 모펫(Samuel A. Moffet)선교사 26세, 의사 알렌(H. N. Allen)선교사 27세, 아펜젤러(H. G. Appenzeller)선교사 27세, 의사 스크랜턴(W. B. Scranton)선교사 29세, 기포드(D. L. Gifford)선교사 29세였습니다.
미국 의사 스크랜턴(W. B. Scranton)선교사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선교사는 1885년 5월 입국 당시 53세로 최고령자였습니다. 그녀는 1888년에 ‘이화학당’과 ‘여성교회’를 세우고 ‘전도부인’을 활용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사역중인 20대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할 때 나이가 61세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선교사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도 많은 유급 사역자들을 두어 교회를 개척하게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개종하고, 취직 목적으로 전도인이 되는 이른바 ‘쌀 신자'(rice christian)만 양산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이 세운 건강한 토착교회가 자신들의 사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선교 기금에서 토착교회 사역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선교사들의 관행을 비판했습니다. 그렇기에 특히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887년(고종24년) ‘도깨비불’로 불리던 최초의 전깃불이 경복궁에 들어오고, 1891년(고종 28년)은 한성에서 원산에 이르는 전선을 가설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북로전선조약(北路電線條約)을 체결한 해입니다. 이처럼 급변하는 조선의 변화속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를 선교 현장에서 적용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일련의 “규범과 세칙”(Rules and By-laws)으로 정리합니다. 10가지로 정리된 조항들 가운데서 성경이 사역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자립ㆍ자치ㆍ자전이란 용어를 사용해 각각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이 정책은 다시 확대 적용되어 1893년 ‘장로교선교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조선 선교정책을 채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①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한다. ②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된다. ③ 자전(Self-Propagation)은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④ 자치(Self-Government)는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⑤ 자립(Self-Support)은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토착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선교사)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영수와 순회 조사아래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⑦ 성경적 형벌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한다. ⑧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며 연합한다. ⑨ 법정 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할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구현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조선에 새로 온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사역의 방법론’(Method of Mission Work)과 10가지 정책을 숙지해야 했고, 이 같은 전략을 통해 선교사들은 정책적 연합을 유지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글성경을 읽어주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의 활동과 농한기를 이용한 개척교회의 사경회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 중심에 한글성경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890년(고종27년) 6월에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서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가 조선에 전해지고, 1891년(고종 28년)에 이를 실행하기 위한 세칙이 마련됐습니다. 1893년(고종30년)에 ‘장로교선교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조선 선교정책으로 채택합니다. 1894년(고종 31년)에 노비제가 폐지되고 과부의 재혼도 허용됩니다. 이어서 언문(한글)이 ‘우리글’ 곧 국어로 선포됩니다. 왕실 공문서는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 고종 황제의 칙령 제1순위로 언문(한글)이 우선됩니다. 한문번역본과 국한문체는 그 다음인 것입니다. 이를 10여년전에 예견한듯… 한글 성경을 그것도 청나라(중국)에서 번역하여 편찬한 서양선교사가 있었습니다.
1872년(고종9년) 청나라에 파송되어 심양과 만주 간도지방에서 사역하던 스코틀랜드 존 로스(John Rosse)선교사는 그의 매제(妹弟)인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선교사와 함께 1882년(고종19년) 3월에 조선어(언문) 누가복음, 1883년(고종20년)에 요한복음을 출판합니다. 이어서 번역에 동참한 이응찬(李應贊) 등을 권서인(勸書人)으로 세우고 조선인 거주지역인 간도지방을 비롯해서 한양(서울), 의주, 황해도 전역에 보급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조선시대 상황을 꿰뚫어본 그들의 선견지명입니다. 마치 10여년 후 1894년(고종 31년)의 노비제 폐지에 의한 ‘해방 노비’와 비천한 계층으로 천대받던 여성들에게, 배우기 쉬운 민중의 언어 한글로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신 성령의 “지혜와 명철”(잠9:10)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여인의 복음’으로 불립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조선 시대처럼 남성의 소유물이나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며, 열등한 존재로 억눌려 살아왔던 여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서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부채와 생계를 이유로 스스로를 노비로 팔아야만 했던 자매노비(自賣奴婢)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여성들에게 ‘전도부인’이 읽어주는 누가복음은 새 희망이며 자유와 해방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영아사망율은 50%가 넘었습니다. 당시 여인들의 가장 큰 슬픔은 자녀의 죽음이었습니다. 비통함에 빠져 있는 여인들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기적들을 발견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와 같은 한글 성경에 대해서 어학의 천재 소리를 듣고 있던 게일(J. S. Gale)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쉬운 한글을 이용해 선교 적기에 신약성경이 번역됐다. 식자들은 한문 성경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 중 특히 여성들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갖게 됐다. 만약 중국이 이렇게 축복받을 상황이었다면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성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어서 그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과 헬라어 “데오스”(Theos)의 한글 번역에 대해서도 미국의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선에는 기독교의 ‘GOD’에 상응하는 위대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하나님’(Hanani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선교회와 감리교인 대부분은 ‘하나님’(Hananim)이라는 순수한 조선 토착민들의 말을 사용하기 원합니다.” 그는 이처럼 한글의 우수성과 성경 번역의 탁월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1893년(고종30년)에 한글성경 번역을 진행하던 번역위원(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터 존스, 피터스, 게일, 레이놀즈,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됐던 것은 신(GOD)에 대한 칭호를 ‘하나님’ 아니면 ‘천주(天主)’ 또는 ‘상제(上帝)’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수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으로 정하기를 주장하였고, 어학적 재능이 뛰어난 언더우드 선교사였지만 한동안 이 용어를 거부했다고 전해집니다.
1890년(고종27년) 6월에 중국에서 온 네비우스 선교사는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를 전할 때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임을 역설합니다. 그때 듣게 된 20대 선교사들 대부분이 1893년(고종30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주축이 된 한글성경 번역을 위한 위원회 발족과 1895년(고종32년)에는 성서공회 설립에도 참여하여, 1900년(대한제국 광무4년) 5월에 신약성경 전부를 완역해냅니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젼셔’로,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가 전체 책임자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특별한 ‘한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고종 31년)에 노비제가 폐지된 그 해, 한글이 ‘국어’로 선포됐으나 왕실 공문서는 대부분 국한문을 혼용한 형식으로 작성되어 한문과 국한 혼용문을 쓸 수밖에 없어서, 근대지식인들 조차도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국어의 규범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였습니다. 당시 한글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자기 주관에 따라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을 썼습니다. 한글이 소리를 잘 표현하지만 공인된 철자법이 존재하지 않아 같은 말을 한글로 적더라도 사람마다 표기가 달랐던 것입니다. 이 같은 시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기존의 존 로스 선교사 번역본과 일본 유학생 이수정의 국한문번역본을 참고하되, 한글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고 편찬한 것입니다. (1933년 10월19일 조선어학회 한글 마춤법 통일안 확정)
1893년 네비우스 선교사의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를 ‘장로교선교공의회’가 공식적인 선교정책으로 채택하던 시점의 조선 환경을 되돌아봅니다. 1894년 국호가 ‘조선’에서 1897년에는 ‘대한제국’으로, 그 해 10월에는 ‘대한(大韓)’으로 바뀝니다. 1887년 경복궁에 전등불이 들어오더니 1899년 5월에는 전차가 운행됩니다.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양반과 천민이 똑 같은 삯을 내고 함께 탑니다. 1899년 9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고 평소 우마차로 12시간씩 걸리던 거리가 1시간 30분 거리로 좁혀졌습니다. 그때는 하루 밤만 자고 나도 천지가 개벽하던 시기였습니다.
전차는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경인선 기차 요금은 1등 객차 1원50전, 2등 객차 80전, 3등 객차 40전 등으로 세분화됐습니다. 당시 쌀 1가마(80kg) 가격이 4원인 점을 고려하면 1등실 요금은 지금으로 치면 약 11만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조선시대 최하 관직은 9품(지금의 9급)으로 1분기에 쌀 2석(80kg 쌀4가마), 콩 1석(80kg 쌀 2가마)입니다. 지금 80kg 쌀 한 가마는 대략 20만원 내외입니다. 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메주콩의 경우 약 40만원입니다. 그럼 조선시대 9품의 경우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연봉 약 120만원으로 한 달 월급으로 계산하면 10만원입니다. (경인선 1등실 요금이 당시 9품 관직의 한 달 급여였습니다)
이어서 ‘전도부인’의 활동을 살펴봅니다. 미국 장로회 선교회는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의 ‘네비우스 원칙’을 채택하여 선교회가 급여를 지불하고 고용하는 조선인의 숫자를 엄격하게 제한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의 유급 전도부인 외에 순수한 열정의 전도부인들은 스스로 성서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자신과 같은 여성들에게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면 집안에서 읽어줬습니다.
그 당시에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선교사는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 기독교를 야소교(耶蘇敎)라 부르며 “서양 귀신을 믿는 종교”로,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먹는다는 등의 괴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양을 두려워하던 조선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특히 조선 여성들의 거부감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초기 선교사들의 우리말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기에 이들을 대신해준 ‘전도부인’들의 역할은 복음전파에 없어서 안 될 존재였습니다.
‘야소’(耶蘇)는 헬라어 ‘예수스'(Ιησούς)를 음역한 것으로, 초기 한글성경이 중국성경의 영향으로 예수교를 한자 표기 발음대로 야소교(耶蘇敎)라고 적었습니다. 1901년 9월 조직된 4개 선교단체의 공식 명칭이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 (The Presbyterian Council)였습니다. ‘야소’(耶蘇)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대로 사용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1890년대 중반이면 여성들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이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에 세워지게 됩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서양 선교사의 집을 찾아온 구경꾼들이 그 모임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또 양반 계층의 여성들도 안방을 중심으로 한 심방과 교류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곳에서 선교사의 서투른 말을 통역하고 다른 여성들의 이해를 돕는 ‘전도부인’ 활동이 계속되면서, 점차 과부회, 여전도회 등 형태로 발전해 나갑니다. (초기 ‘전도부인’ 통계는 1215명(감리교 717명, 장로교 209명, 성결교 138명, 기타 교단 151명)입니다. 교세에 비해 장로교 전도부인 숫자가 현저하게 적은 것은 네비우스 삼자정책 시행으로, 무보수 전도부인은 봉사자로 분류되어 숫자에서 제외되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였습니다. 농경지의 70% 이상이 밭이었고, 벼도 밭에서 재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곡물로 보면 벼농사와 콩농사가 중심이었습니다. 농업사회였지만 풍년은 자주 없었습니다. 특히 1894년(고종 31년) 1월엔 호남지방에서 농학혁명의 전초인 민란이 일어나고, 6월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더니 8월에는 평양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고, 화전민이 되거나 아예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는 농민들도 늘어나고 있을 때입니다.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자립(Self-Support) 정책에 따라 사경회(Bible Conference Movement)때 나눠주던 소책자도 소정의 금액을 받고 판매하게 됩니다.
사경회는 풀어서 설명하면 성경(經)을 깊이 살핀다(査)는 뜻입니다.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성경 말씀을 듣기 위해서 본인들이 왕복 여비와 식비 일체를 감당하며 먼 길을 와야했습니다. 곽안련(郭安連)으로 익숙한 찰스 알렌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선교사가 인도한 사경회 때입니다. 14명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한양까지 600리를 걸어왔고, 3명은 400리, 그리고 80명이 평균 60리를 걸어서 왔습니다. 당시 급하게 걸으면 하루 80~100리를 갈 수 있었으므로, 이들은 며칠씩 노숙하며 온 것입니다. 네비우스 자립(Self-Support) 정책은 이와 같이 사경회 참석자의 90%인 농민들의 재정적 부담과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에서 사역중인 선교사들에게 삼자정책의 원리를 전한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선교사는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농부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농사짓는 일을 경험했기에, 그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살려 농업기술을 중국인에게 가르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1869년 미국으로 잠시 돌아와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산동 지방에서 선교하며 항주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습니다. 그는 특히 과일나무 묘목을 가져 다가 그 지방의 토양에 맞게 개량하여 보급하는 데에도 공헌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사가 조선 선교사들에게 전했던 ⑤ 자립(Self-Support)은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토착 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선교사)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즉, 부르심의 그 자리에서 각자의 은사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1889년(고종26년) 12월 도착한 캐나다의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는 원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합니다. 전도활동에 중점을 둔 그의 사역은 46년간 20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250여명의 사역자를 배출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자립선교가 있습니다. 원산 관교동에 1만여평의 과수원과 농장을 조성하여 자립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성도들에게 비료와 재의 사용, 양계, 사과, 튤립 재배 등을 가르쳤고, 원산 지역의 농업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892년 한국 이름 ‘소안론’(蘇安論)의 윌리엄 스왈렌 (William L. Swallen) 선교사는 당시 평양에 있던 숭실대 농학부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모펫(Samuel A. Moffet) 선교사와 함께 평양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농대를 나와 신학을 공부하였기에, 평양 외곽에서 농사를 짓고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그 방법을 조선인들에게 전해줬습니다. 안식년때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 묘목 300그루 중에, 150그루는 황해도 해주, 나머지 150그루는 선교본부가 있는 대구에 심었습니다. 이것이 황해도 해주(황주)와 대구 사과의 효시가 된 것입니다.
1894년 대구에서 사역하던 한국 이름 ‘안의와'(安義窩)인 에드워드 애덤스(James E. Adams) 선교사는 자신의 고향인 미국의 캔자스주에서 사과 묘목을 들여와 조선의 토종 능금나무에다가 접붙임을 했습니다. 1897년에는 존슨(W. O. Johnson) 선교사 또한 대구 사역지 병원의 자택 정원에 72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고, 1909년에는 아치볼드 플레처(A. G. Fletcher) 선교사가 고향인 캘리포니아에서 가져온 사과 묘목을 자택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는 대구 동산기독병원(현 계명대 동산의료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병원 직원들과 함께 경북의 농촌 각지에 112개 교회를 세웠습니다.
1908년(대한제국 순종2년)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농촌과 식량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바 있습니다. “농장과 목축의 비율을 적절하게 안배하는 문제, 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문제, 또 농작물의 농작을 적당히 조절하는 문제에 대해 조선인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의 토양은 훌륭한 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채소의 종류도 풍부하나 볼품이 없고 맛이 없다. 과수를 덮치는 각종 기생충을 근절시키는 수단을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과일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게 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어 아직 익지도 않은 것을 거의 다 버리고 만다.”
이미 미국의 서양 농업기술을 알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선의 농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땅은 비옥한데 농사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이 없어 농사를 망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농사 지식이나 기술만 제대로 갖춘다면 조선의 기근이나 굶주림의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여기서 그는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조선인을 적극적으로 계몽하기 위한 방법으로 단기간에 농사 지식과 정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신문을 구상하고, 이어서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4월1일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합니다.
[그리스도 신문]이 창간되던 1897년에 큰 흉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쌀 한가마니(80kg) 20만원을 기준으로 기록을 살펴보면, 병충해(1759년 9월)때 47만원, 보릿고개(1768년 5월)때 40만원이지만 흉년(1783년 12월)에는 쌀 한 가마니가 60만원입니다. 쌀값이 3배로 폭등합니다. 심지어 만주로 이주해 갔던 사람들은 초근목피(풀뿌리와 나무 껍데기를 끊여서 죽처럼 먹는다는 말)조차 없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어린 딸을 청나라 사람에게 팔아 넘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흉년이 있을 때마다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의 해마다 거듭되는 흉년과 기근의 피해를 막기 위해 ‘구황작물’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주곡대신 소비할 수 있는 농작물)로 ‘밀’도 병행해서 재배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제안을 합니다. “우리는 작년의 년사를 말할진대 년사가 좀 부죡하기는 하나 큰 흉년이라 할 수는 없는지라 조고마한 흉년에 곡가가 대단히 고등하여 인민이 만히 아표디경을 당하는 거슨 …(중략)… 우리 대한이 본래 벼는 숭샹하나 밀은 슝샹치 아니하는 고로 비가 부죡하게 오는 해에는 번번히 흉년을 당하는 거시오.” (그리스도신문 1898년 6월자17일 논설)
[그리스도 신문]은 전체 8면으로 기독교 교리, 농사와 관보를 싣고 일주일에 1회 간행합니다. 선교사 알렌(H. N. Allen), 벙커(D. H. Bunker), 헐버트(H. B. Hulbert)와 미국공사 실(J. M. B. Sill) 등이 글을 쓰면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가 한글로 옮겨 쓰는 편집을 맡고, 행정 사무는 의사인 빈튼(C. C. Vinton)선교사가 맡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농업발전을 도모하고자 직간접적으로 서양의 농법과 기계의 편리함을 알리고 특별히 8면은 전체를 다양한 광고란으로 적극 활용하여 물품을 소개하고 판매까지 이뤄지도록 계획합니다.
[그리스도 신문]은 독자층이 지극히 제한된 유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판매가 되고 운영에 필요한 수익이 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발행에 대한 모든 재정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책임집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재정후원자가 있었습니다. 존 토마스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는 미국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Underwood Typewriter Company)를 설립한 기업가로, 그의 타자기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황실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국제적인 명성의 제품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 의해 황실과 왕실에 공식 납품업자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1885년 조선 선교사로 파송된 동생 ‘호레이스(Horace)언더우드’의 선교 사역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연세대학교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이름을 쓰게 된 경신학교 대학부) 또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했고, 이때에도 학교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의 모든 비용은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가 지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사업가인 형의 후원을 받아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농사와 관보 등 기독교 이외의 기사가 많아, 이 신문 467부를 구입하여 정부 10개 부처와 367개 군에 배포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선의적인 태도보다는 서양 문명을 백성에게 알리려는 이른바 계몽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1년전 먼저 창간한 ‘독립신문’ 설립자본금 3,000원과 사옥비용 1,400원을 정부에서 지원한 바 있고, 처음 발행부수가 한글과 영문 각각 300부였음을 감안했을 때, [그리스도 신문] 467부를 매입해준 것은 고종황제의 통역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신문은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가 발행부수의 수십~수백배가 되었습니다. 신문 1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실제 독자층은 발행부수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구한말의 근대적 신문(1883년 한성순보, 1896년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있었고,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1897년 2월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잡지를 발간한 상황에서, 불과 2달 후인 4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합니다. 그후 여러 일간지가 연이어서 창간됩니다(1898년 매일신문, 1898년 제국신문, 1899년 황성신문). 이것은 매우 협소한 독자층의 구독료와 광고에 의존하고 있던 신문들이 치열한 상호 경쟁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핵심 문제는 ‘자립’(Self-Support)에 있습니다.
‘독립신문’은 1부 가격이 동전 ‘한 푼’이지만, 신문 1부 원가는 동전 ‘한 푼 육 리’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처음에는 300부씩 인쇄하던 것이 곧 500부가 되고 나중에는 3,000부씩 발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문구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신문사는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합니다. 결국 창간 1년만에 신문 대금을 인상합니다. 국문판 1부에 2전 (월 25전, 연 2원 60전)으로 올리고, 또한 신문사 인쇄시설을 활용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창간한 [그리스도 신문]을 인쇄해주고, 그 외에도 명함 인쇄, 문방구 판매, 통신 중계 영업 등 부수적인 사업으로 부족한 수입을 보충합니다. (현재 시세 동전 ‘1푼’은 200~500원 선)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리스도 신문] 창간 목적에 부합되면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합니다. 1896년 (고종33년) 당시 총 258개의 외국인 상사가 조선에 진출해 있었습니다. 그중 일본 상사가 210개로 일본 상인의 진출이 압도적이었고, 그 다음이 청나라 상인이었습니다. 이들의 중계무역으로 영국산 면제품을 비롯하여 서구의 근대공장제 상품이 대량 유입되었으며, 특히 1876년(고종13년) 개항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게 된 제물포(인천)에는 미국 · 영국 · 러시아 · 독일 등 서구상인들이 상사를 개설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업과 무역 외에도 광업과 대금업 등 다양한 영역에 투자하고, 수입한 제품들은 신문 광고를 통해서 유통시키고 있었습니다.
‘독립신문’을 비롯한 일간 신문들은 미국의 대중 신문과 마찬가지로 동전 ‘한 푼’의 염가 신문을 표방했습니다. 영리가 목적이 아닌 국민 계몽을 목적으로 적자를 감수하고 발행한다는 것으로, 뒤늦게 창간한 후발 주자들 역시 이미 형성된 시장 가격을 뛰어넘지 못하고… 예측되는 적자 감소는 구독료와 광고 유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런 경쟁 상황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리스도 신문] 구독자층을 늘리기 위해서,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선교를 위한 비즈니스’(Business For Mission : BFM)를 실천합니다. (이 같은 사례와 자료를 최초로 발굴해내고 분석하던 2024년 현재 시점에서도 이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서양에서 1850년대에 재봉틀이 발명되고 조선에는 1877년(고종14년) 처음 소개됩니다. 이어서 1896년 ‘재봉’과 ‘자수’가 이화학당의 교과목으로 등장하는데… (1856년 미국에서 재봉틀 가격은 300달러, 대량 생산되면서 100달러까지 내려가고) 1897년 가장 저렴한 제품이 50달러 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담이 되어서 “1주일에 1달러씩” 갚는 방식으로 판매가 이뤄질 때입니다. 당시 조선에서 ‘전도부인’ 월급이 5달러(7원)였으며, 10달을 쓰지 않고 모아야 구매할 수 있는 재봉틀을 별도의 수입 비용 부담도 없이 ‘신규 구독자 유치’ 선물로 준다는 파격적인 제안의 광고를 합니다.
다음은 [그리스도 신문]에 실린 재봉틀 광고 내용입니다(일부 발췌) “자봉침을 거저 얻으려 하는 사람은 자봉침을 돈 없이 얻을 터이면 공히 얻는 도리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신문사에서 미국에 기별하여 자봉침 수십틀을 내여 올것이니 누구든지 이 신문을 일년치로 보시려 하는 이에게 신문가(가격) 선급하는 것을 지금부터 한 사람이 이십 오도를 모아 얻어오면 자봉침 하나씩을 거저 줄터이니 신문 볼 사람을 어서오시오.” (그리스도신문 1898년 7월 21일)
“자봉침을 거저 얻는 단 말을 그리스도신문에 여러번 광고하였거니와 지금은 그 자봉침 여러틀이 나왔으니 경향간에 누구시든지 자봉침을 한틀을 거져얻고 싶으신 이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신문 볼 사람 십오명에게 신문가 십오원과 십오명의 거처와 성명을 자세히 기록하여 가지고 그리스도 신문사로 오시면 자봉침 한틀을 거져 드릴터이오 또 자봉침 얻으시는 이에게는 지금부터 섣달그믐까지 나는 신문을 매호에 일도식 거져 드릴터이오니 신문 볼 사람을 많이 인도하시오” (그리스도신문 1898년 11월 17일)
“이 자봉침은 크지는 아니하나 단단하게 잘 만들어 힘도 있고 쓰기에 매우 편리하여 어린애라도 바느질을 하기가 쉽고 또 무슨 바느질이든지 자봉침으로 할 바느질은 다 할 수가 있는데 쓰는 법은 한 손으로는 꼭지를 잡고 돌리고 한 손으로는 헝겊을 먹여 넣으면 잘 꿰매지는데 누구든지 이 자봉침을 구경하러하려 하시거든 그리스도신문국으로 와서 보시오.” (그리스도신문 1898년 11월 17일)
“또 만일에 시골에 있어 돈을 보내기가 어렵거든 그곳에서 신문가로 한돈자리 우표를 사서 보내고 또 십오명의 신문 일년치 우표값까지 다 보내시오 또 자봉침 가지실이가 시골에 있으면 우리가 보내여 드릴터이나 보내는 부비는 받는이가 담당하겠소” (그리스도신문 1898년 11월 17일)
이와 같은 광고는 당시 [그리스도 신문]을 몇 사람의 서양 선교사들이 소규모로 운영하는 ‘종교신문’ 정도로 가치 절하하고 있던 경쟁 신문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제물포에 상사를 설치하고 중계무역을 하던 수입상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를 현재 관점에서 보면, ‘고객관계경영’(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 CRM)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 구독자의 충성도와 기대치를 증가시키고, 증대된 만족과 로열티를 통해 새로운 구독자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객과의 일련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문] 1년치 구독료는 10달러(15원) 정도입니다. 새로운 구독자 15인을 유치하면 년간 150달러 수입이 예상되지만, 그 중에서 1/3 이상을 신규 유치에 수고한 구독자에게 재봉틀로 되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수익이 날 수 없는 이런 구조에서 보다 저렴한 제품의 선물도 있을 터인데, 왜 이처럼 고가의 ‘재봉틀’을 선물로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문]은 “목적이 이끄는 기업”(Purpose-driven Company)으로 “선교적인 비즈니스” (Missional Business)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양반과 부유한 집은 주로 비단옷을 입었고, 일반 서민은 무명을 걸치고 생활했습니다. 농번기에는 작물을 재배하고 농한기에는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바느질 솜씨가 좋으면 양반의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 주고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손바느질과 수작업으로 여자 한복 한 벌을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최소 2~3일, 남자 한복 한 벌에도 꼬박 하루를 매달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1896년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선교사의 이화학당이 새로운 교과목으로 ‘재봉’과 ‘자수’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개량된 통치마에 긴 저고리를 여학교 교복으로 만들어냈으며 이후 일반 여성복식의 개량을 주도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점 1897년에 [그리스도 신문]의 재봉틀이 제공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처럼, 미국에서도 재봉틀이 발명되기 전에 여성들은 가족의 옷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산층 주부들은 고용된 재봉사의 도움을 받아도 매달 며칠을 이 작업에 바쳤습니다. 숙련된 재봉사가 남성용 셔츠를 만드는 데 최소 14시간, 여성의 드레스는 10시간이 걸렸습니다. 매우 부유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업복과 일요일 복장이라는 두 세트의 옷만 가지고 있던 시대에, 재봉틀은 1시간 15분만에 셔츠를 만들어냈습니다. 여성드레스는 1시간, 여름바지는 38분이면 만들었습니다. 재봉틀은 여성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줬고 여유시간은 늘려줬으며, 더 많은 일자리와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의복 제작에 필수적인 바느질을 부녀자 교육에서 특히 강조하였으며, 바느질을 직업으로 하는 침모(針母)와 침선가(針線家)도 있었습니다. 침모는 남의 집에 고용되어 바느질을 도맡아 하는 여인으로, 출신 계층 중에는 몰락한 양반집 독신녀이거나 과부, 혹은 중인 계급의 여인도 많이 있었습니다. 침선가는 자신의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는 여인이며, 만들기가 매우 까다로웠던 벼슬아치들의 관복이나 제복, 도포 및 혼수 옷 짓는 일들을 전문으로 했습니다. 궁궐 안의 상의원(尙衣院)에는 침선장(針線匠)을 두어 왕과 왕비 및 왕실 가족의 침선을 맡게 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그리스도 신문]은 재봉틀 외에도 {바늘 만드는 기계}, {밭농사에 꼭 필요한 소도구}, {미국 곡식 종자} 등 농사에 도움이 되거나 개화기 여성에게 필요한 수입물품들을 지속적으로 광고했습니다. 이어서 재봉틀처럼 신문사 사무실에 전시하면서 어떤 품목은 무료로 제공하거나 판매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미국 곡식 종자’ 광고를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신문 보시는 이는 명년 일년치 신문 값을 미리 선급하여 보내시면 명년 봄에 미국 농사에 심는 여러 가지 좋은 종자를 거져 줄터이니 명년 신문가를 선급하시오.” (그리스도신문 1898년 10월20일)
[그리스도신문]의 ‘바늘 만드는 기계‘ 광고를 보면, 언더우드 선교사의 시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립’에 대한 통찰력이 전해집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 기술의 후진성을 언급할 때는 바늘을 예로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이 문화국가로 주장하는 근거는 예약의 실천에 있었고, 예약의 실천은 의복제도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늘이 없으면 의복을 만들 수 없으므로 예약의 실천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마련인데, 당시 조선에는 바늘을 제작할 기술이 없어 전량을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세기에 이강회(李綱會)는 만일 청나라가 바늘 수출을 중단하면 조선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 하면서, 조선기술의 낙후성을 비판했습니다.
“부인네들의 일은 바늘의 도움을 받아야 이루어집니다. 동방 수천리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의복은 어느 하나 바늘을 쓰지 않으면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바늘을 벼리는 장인이 있습니까? 만약 중국에서 하루 아침에 사신의 교역을 금지하여 바늘 한 보쌈도 압록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할지 모를 것입니다. 의복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건 만드는 자는 망건을 만들지 못하여 온 나라 사람이 머리를 쌀 것이 없어집니다. 바늘 조차도 이런 지경이니, 다른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김문식의 한국문화사, 이강회 운곡잡저(雲谷雜著)에서 발췌)
이외에도 [그리스도신문]에는 거름 만드는 법, 접붙이는 방법, 소 젖 짜는 법, 감자 재배법, 돼지 설사병, 씨 심는 기계 사용법, 오리 기르는 방법, 달걀을 곯지 않게 하는 법 등 농사와 관련된 모든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어서 미국에서 밭 가는 기계, 씨 뿌리는 기계, 풀 베는 기계 등도 도입했지만 농민들이 전통 농사법에 익숙해 있고, 기계를 구입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판매량은 저조했습니다. (그리스도신문, 1897년~1901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사람들을 도우며 또한 신문사의 ‘자립’(Self-Support)를 위해서 일부 상품들을 수입하여 판매했으나, 이는 미국 상인들과 다른 국적 수입상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선교사들은 생활이 보장되고 비용도 들지 않기 때문에 싼 가격에 판매할 것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농기구들과 재봉틀을 들여왔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독립신문’ 영문판 기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일부 물품에 대한 판권을 차지하여 우리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농기계와 기구를 수입해 들여온 것은 나 밖에 없다. 나는 여러 번 판매 대리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항상 거절해 왔고, 요청만 한다면 그런 일을 해 줄 무역회사들이 이곳에 있다고 분명히 대답해 왔다. 나는 어떤 물품에 대해서도 대리인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중략…
“조선사람들에게 (해열·진통·말라리아 예방·치료제) 키니네(quinine)를 공급했는데,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은 우리 사업의 일부이다. …중략… 키니네를 팔아서 기독교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고, 책을 사고, 책방을 유지 보수하며, 인쇄된 복음을 전파시킨다…중략…내가 행한 일들이 조선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자 목적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시장이 형성되어 앞으로 수입을 주도할)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면서 자신의 활동이 오히려 무역을 하는 사람에게 일조한 것임을 시사하였고, 자기 자신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1896년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선교사의 이화학당이 처음으로 ‘재봉’과 ‘자수’를 가르치기 시작하던 해, [그리스도 신문]에서 신규 구독자 모집 선물로 재봉틀이 제공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교한 여학교들도 이화학당을 따라 학과목에 ‘재봉’이 포함되면서(1895년 서울 정신여학교, 부산 동래 일신여학교, 1896년 평양 숭현여학교, 1897년 인천 영화여학교, 1898년 서울 배화여학교 등) 때맞춰 [그리스도 신문]과 성서공회 총무로 섬기는 ‘챨스 빈턴’(Charles C. Vinton) 선교사가 전도를 위한 기금 확보를 위하여 “값싼(cheap)” 재봉틀 100대를 수입하여 판매합니다. 이것은 실습이 필요한 학생들과 저렴한 실습교재가 필요했던 학교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이후 1904년 이화학당 3학년 교과목에 ‘재봉기 사용법’이 들어갑니다)
여기서 “값싼(cheap)” 재봉틀이라 한 것은 당시 중계무역을 하던 미국 수입상들이 언더우드 선교사 문제를 조선 주재 미국공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에게 보낸 문서에 표현된 것입니다. 이번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자립선교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당시 미국에서 판매중인 재봉틀이 3종류가 있고(100달러, 75달러, 50달러) 브랜드는 싱거(Singer) 가정용이며 주급을 받는 ‘1주일에 1달러’씩 할부로 구입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조선에는 발틀이 없이 손으로 돌리는 “값싼(cheap)” 50달러 제품이 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고가품을 무상으로 준 언더우드 선교사의 마케팅적 발상이 대단하고, 그렇기에 모두 ‘센세이션(sensation)’ 했다고 그때의 충격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7년 싱거(Singer) 미싱의 국내 판매가격을 보면 ‘손틀’은 200원, ‘발틀’은 270원이었습니다. 그때 보통학교 교사 초임이 35원이었으므로 재봉틀은 “값싼(cheap)” 제품이 아닙니다. 6~7개월의 교사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재봉틀은 여성들의 혼수품 1순위였고, 당시 바느질 품삯으로 살아가던 과부들이 많았기에 재봉틀은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재봉틀의 대중화는 이화학당의 봉재 교육과 [그리스도 신문]의 선물로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재봉틀 100대에 이어서 또 한번 무역상인들과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 중심에 ‘챨스 빈턴’(Charles C. Vinton)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이면서 1893년(고종30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끌었던 한글성경 번역을 위한 ‘상임성서실행위원회’ 발족과 1895년(고종32년)에는 성서공회 설립에 참여하여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그는 1900년(대한제국 광무4년) 5월까지 신약성경 전부를 완역하는데 일조했으며, 이후 성경 출판과 함께 그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됐습니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1년) 4월에는 [그리스도 신문] 창간부터 행정과 사무를 총괄했습니다. 그렇기에 ‘자립’(Self-Support)의 중요성과 신문사의 재정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그가 이번에는 ‘벽지’를 수입하여 판매한 것입니다.
‘챨스 빈턴’(Charles C. Vinton) 선교사는 매우 강직한 성품의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에는 1891년 4월, 35세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곧바로 조선황실 의료기관 제중원(현 세브란스병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2년간 섬겼습니다. 제중원의 독립된 재정 운영과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자 사임하고 자택에 설치한 개인진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며 직접적인 복음전도에 집중합니다. 1908년 52세까지 17년간 사역하는 동안 아내와 어린 자녀 셋을 풍토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런 그가 벽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890년(고종27년) 6월에 중국에서 온 네비우스 선교사가 언더우드를 비롯한 7명의 조선 선교사들에게 삼자원리(Three-Self Principles)를 전할 때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마펫(Samuel A. Moffett)선교사가 참석했으며, 빈턴(Charles C. Vinton) 선교사는 1891년(고종28년) 여름에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의주, 만주 등지로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성경이 잘 읽혀 지지 않고 “벽지로 발라지며” 폐지로도 팔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충격을 받고 만주에서 대영성서공회(BFBS) 총무인 털리(R. H. Turley) 선교사를 만나 ‘로스역 성경’ 출판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로스역 이란, 스코틀랜드 존 로스(John Rosse)선교사와 그의 매제(妹弟)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선교사가 조선 언문으로 발간한 1882년(고종19년) ‘누가복음’과 1883년(고종20년) ‘요한복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3년(고종30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주축이 된 한글성경 번역을 함께 했고, 대영성서공회(BFBS)의 털리 선교사가 보내온 존 로스 번역본을 한글로 재번역하는데 기여를 합니다.
1891년이후 빈턴 선교사는 “벽지가 된 성경”에 대해서 또 한번 듣게 됩니다. 만주까지 전도여행을 함께 했던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가 1893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조사 한석진’과 동행했던 그가 많고 많은 주막 중에 “성경으로 도배된 방”에 묵게 된 것입니다. 주인을 불러 자초지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27년전 대동강변에 뿌려진 성경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866년 9월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에게 한문성경을 받은 사람 중에 ‘최치량’이라는 10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넘겨받은 3권의 성경이 금서라는 것을 알고는 겁이 나서 평양의 ‘박영식’이라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당시 도배지가 필요했던 그는 방 전체와 천장 바닥까지 성경책을 뜯어 도배를 해버렸습니다.) 바로 그 집이 주막이 되어있었고 그 방에 마펫 선교사가 묵게 된 것입니다.
빈턴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글성경 번역에 참여하여 1900년(대한제국 광무4년) 5월까지 신약성경 전부를 완역하는데 일조했으며, 이후 성경 출판과 함께 여러 선교사 중에서 그가 성서공회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됐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시간과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 출판된 성경이지만, 그 중에서 일부는 “벽지가 될 성경”도 있을 것입니다. 빈턴 선교사에게 성경 보급은 마치 벽지를 함께 보내는 것과 같았을 것이기에, 성경이 제대로 읽힐 수 있도록 따로 벽지를 수입해서 판매하려 했을 것입니다.
빈턴 선교사의 벽지 수입은 당시에도 물의를 일으키게 된 “수수께끼 같은 행동”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지금도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성서공회’사무실을 이용하여 “재봉틀과 벽지를 판매한 선교사”로 왠지 부정적인 느낌의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가 실천했던 일들을 재조명해보며 다시 평가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특히 벽지를 수입한 1906년(대한제국 광무10년)은 빈턴 선교사가 [그리스도신문]의 모든 재정을 담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7년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창간한 [그리스도회보]와 1905년 7월1일 합해져 교파연합신문이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회보] 발행인 아펜젤러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귀환한 1900년 9월 이후 사실상 발행이 중단되었고, 그후 귀국하는 과정에서 해상교통 사고로 순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더 이상 맥이 이어지지 못하다가 통합 전의 장로교 [그리스도신문]이 면수도 많았고 내용이 풍부했으므로, 통합신문의 제호와 통권수도 [그리스도신문]을 그대로 계승하여 통합하게 된 것입니다.)
통합이전 [그리스도신문]은 종교적 내용뿐만 아니라 국내외 뉴스와 농업 · 공업 등의 다양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졌으며, 특히 여러 가지 상품을 광고로 게재하여 당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빈턴 선교사의 동료 의사인 스크랜턴 선교사 어머니(Mary F. Scranton)가 세운 ‘이화학당’ 교과목에 ‘재봉’과 ‘자수’가 들어갔을 때에는 [그리스도신문]의 재봉틀 선물광고에 이어서, 재봉틀 100대를 수입하여 판매합니다. (이후 1904년 이화학당 3학년 교과목에 ‘재봉기 사용법’이, 1905년 12월에는 싱거(Singer) 미싱이 조선에 직접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재봉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안목과 추진력의 빈턴 선교사가 1905년 7월 ‘장· 감’교파연합신문으로 새롭게 출범한 [그리스도신문]의 재정을 담당합니다.
[그리스도신문] 창간 1년전,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이 창간합니다. 당시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됐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과 누적된 적자(광고 수입은 10.6%)로 창간 3년 8개월만에 종간호를 내고 폐간됩니다(1899년 12월 4일).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회생노력이 있었습니다. 1899년 1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주필로 취임하였고, 6월에는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가 사장 겸 주필로 임명되었으나, 신문사의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대한제국 외부대신이 1899년 11월 27일 신문사 사옥 반환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미국 공사였던 알렌 선교사는 정부와 서재필 사이에서 중개를 알선합니다. 이렇게 하여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24일자로 인쇄시설과 사옥을 포함한 모든 권리가 일금 4,000원에 정부로 양도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독립신문’의 안타까웠던 단명과 달리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조선 속담을 인용하며 합동발간의 명분과 실리를 강조했던 [그리스도신문]은 실제로 면수도 12~20면으로 늘리고, 사장 겸 편집주간은 게일(James S. Gale)선교사, 공동편집인은 케이블(Elmer M. Cable), 무스(J. Robert Moose), 무어(Samuel Foreman Moore) 선교사 등이 맡았고, 재정은 빈턴(Charles C. Vinton)선교사가 담당했습니다. 1906년에 들어서서 발행과 경영인이 게일, 언더우드, 무어,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선교사까지 여러차례 바뀌었으며, 편집진에는 새롭게 존스(George H. Jones) 선교사가 참여하였고, 1907년 12월 3일부터 [예수교신보]로 이름이 바뀌어 1910년까지 약 3년간 격 주간으로 발행됐습니다. 1915년 12월 8일 제2차 장감연합 신문인 [기독신보]를 발행하여 1937년까지 22년간 교파연합 신문으로 지속됐습니다.
편집진에 합류한 존스(George H. Jones) 선교사는 1888년(고종25년) 20 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에 도착하여, 조선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인천 내리(內里) 교회 담임으로 11년간 섬깁니다. 1903년 존스 선교사가 적극 추진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건너간 조선 최초의 공식 이민단 102명 중에 50명이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존스 선교사를 만나 개신교에 입교와 신학교육을 받은 ‘홍승하’ 목사가 선교사 자격으로 동행했습니다. 그는 1903년 11월 안정수·우병길 등 교인들과 한인선교회를 창설하여 하와이한인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1905년 정식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와이 이민의 배경에는 대한제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시베리아나 만주로 이주하던 때,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일본의 반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떠나게 됩니다. 초창기에 이들 미국이민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천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의 개척자정신이 탁월하게 돋보입니다.
1905년 7월에 통합된 [그리스도신문]의 재정 담당으로 빈턴 선교사가 선임된 것은 평소 그의 강직한 성품과 추진력 그리고 ‘자립(Self-Support)’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선교사들의 이 같은 결정에는 외부 재정에 의존하던 ‘독립신문’의 폐간 사례와 함께, 당시 매우 민감했고 한 치 앞을 예단하기 어려웠던 조선의 정치적 상황도 고려됐을 것입니다.
1905년 9월5일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간에 종전협상이 이뤄집니다. (미국 포츠머스항).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법에 따라 1905년 11월부터 1906년 3월사이에 청국 · 영국 · 미국 ·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의 외국 공관이 조선에서 철수하고 영사관으로 대체됩니다. 워싱턴 주제 ‘대한제국’공사관도 폐쇄됐습니다(1905년 12월16일). 이제 모든 외교적 방법이 단절되어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버립니다. (1906년 2월 일본은 대한제국 한성부 ‘한국통감부’ 설치, 초대 통감 이토 히루부미)
조선의 수입품 중 일본 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01년 61.6%에서 1906년에는 77.3%에 이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구의 75%는 농업이 주업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공포한 ‘조선회사령’의 목적은 조선에 근대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데 있습니다. 즉, 조선은 일본의 식량기지와 공업에 대한 원료제공지요, 상품판매지로 개발한다는 것입니다. (1908년 미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런 식민지정책의 배경을 이해할 때, 당시 중계무역을 하던 수입상들과 잦은 마찰을 빚은 [그리스도신문]의 역할 그리고 ‘자립(Self-Support)’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던 재정 담당자 빈턴 선교사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시간을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리스도신문] 상품 광고를 통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상업 활동 곧, 신문사 자립과 ‘인도주의적’ 상품 수입 및 판매가 세간에 관심을 모으고, 한편으로는 무역상들이 경쟁력에서 위기감을 느꼈을 때입니다. 때마침 미국의 유명한 화덕난로 “Round Oak”스토브 제조회사 대표(Beckwith PD)는 조선에서 ‘판매권’을 줄 수 있는지 문의를 받습니다. 한 명은 ‘유진벨’(Eugene Bell)선교사였고, 또 한 명은 독립신문 영문판 주필이었던 ‘아처 헐버트’(Archer B. Hulbert) 였습니다. 그는 고종황제의 외교고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선교사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들 역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중직(사역+사업)을 모델로 문의하였을 터인데, (유진벨 선교사는 1892년 네쉬빌 전국신학생 선교연맹 대회에서 언더우드의 조선선교 호소를 듣고 자원한 7명 중 1명입니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며 독점판매권을 갖고 있던 보스톤 무역업자 월터 타운젠트(Walter D. Townsend)는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업에 너무 화가 나서…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매우 강한 어조의 편지를 써서 그간 교단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들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해오던 상당한 금액의 후원금을 중단시켜버렸습니다. 이어서 미국 영사관에 여러 수입상들을 대표하여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타운젠트는 1884년 5월 ATC(American Trading Company)의 대리점으로 조선에 들어와 서양목을 팔고 조선 내륙의 쌀을 수집해서 수출했습니다. 이외에도 식료품 · 식기류 · 의약품 등 잡화류 수입과 판매도 겸하면서,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과 소총 및 탄약 등 무기도 수입해 조선정부에 팔았습니다. 이어 1894년 국제여객 증기선이 입출항하는 제물포 월미도에 약 5백만 갤런의 석유저장고를 만들었고 1897년에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조선특약점 계약으로, 조선 내 모든 석유 판매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이런 사업 배경에서 선교사들의 자립과 인도주의 사업을 이해보다는 방해로 여기고,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그리스도신문’ 발행인이며 광고를 적극 활용하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이를 따르는 선교사들을 잠재적 위협의 경쟁자로 여기고 ‘제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는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개화기, 석유로 불을 밝히는 ‘등잔’과 ‘호야등’(HOYA) 또는 ‘남포등’이라 불리던 램프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매일같이 석유 수요가 엄청나게 늘고 있을 때였습니다.
1898년 봄에 작성된 1897년 “대한제국(한국)무역 보고서”에서 미국영사관의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은 총영사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우리 상인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특정 품목의 상품에 대한 매우 비난스러운 관습이 “선교인”들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생활이 보장되고 비용도 들지 않기 때문에 일반 상인보다 싼 가격에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마찰을 일으키고 선교사들로 하여금 금전적 이익을 얻는 데 너무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합니다. 나는 그 실천이 선교 원인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처럼 사업가 타운젠트의 정치적 능력이 미국영사관을 움직였고, 선교사들의 자립 의지는 꺾이고 입지는 좁아졌습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독립신문 영문판에 입장을 표명했으며, 중국 상해에 이미 은행계좌를 개설했고 석탄과 석유를 수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이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이 순수한 복음주의에 반한다는 것과 재정 후원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보스톤 출신 무역상 타운젠트와 충돌했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중심으로 살펴보면, 1885년부터 1895년까지 미국 북장로회에서 조선에 파송한 정규(Regular) 선교사는 모두 39명입니다(여성 20명, 남성 19명). 그 중에 독신선교사가 21명으로 더 많았고, 기혼자는 아홉 부부(18명)입니다.
1906년 미국인 근로자의 연평균 수입은 700달러였습니다. 목사의 연봉은 약 1,500달러. 그의 비서는 약 3분의 2 정도를 받았습니다. 독신선교사는 연봉 700~900달러, 부부는 자녀 수당을 포함해서 연간 1,100~1,200달러였습니다. (자녀가 많은 선교사는 수당을 포함해서 약 2,000달러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뉴욕의 어느 개혁교회에서 1년에 1,500달러 조건으로 청빙을 받았으나, 이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물론 독신이므로 연봉은 700~900달러에 해당됩니다. (월 70달러 정도)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미국 노동자 평균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었지만, 이와 반대로 정말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선교비 후원을 스스로 일으켜야 하는 ‘독립 선교사’의 경우입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행18:3) 사도 바울처럼 직업을 갖고 일을 해서 사역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거나 그마저 안되면 사역을 접고 철수해야 합니다.
독립 선교사와 후원이 끊겼던 선교사들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봅니다. 1889년 12월 도착한 캐나다의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독립 선교사는 1893년 사역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국순회전도단”(The Korean Itinerant Mission) 단체를 만들어 후원을 일으켜 자립선교를 실행했습니다(함경도 원산에 1만여평의 과수원과 농장을 조성). 영적대각성 운동의 선구자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선교사는 1890년 9월이후 약 8년동안 교단소속이 없는 독립 선교사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898년 미국 남감리선교회에 소속되어 후원을 받습니다(1899년 개성 남도병원 설립).
1897년 ‘벙커’(Dalzell Bunker) 선교사는 감리교 성공회선교부를 사임하고, 조선에 진출한 AMC광산회사에서 1년 6개월간 일합니다. 이후 선교사로 복귀할 때 감리교 성공회선교회는 그의 광부 활동이 ‘자급 선교사’의 첫 사례로 이사회에 보고하고 그를 다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904년 4월에는 남장로교선교부의 ‘조셉 놀란’(Joseph W. Nolan) 의사 선교사가 첫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선교부를 사임하고 광산 회사로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에서 서양의사를 구할 수 없기에 이런 유혹이 따릅니다)
선교사들이 때로는 ‘거룩한 부르심’에서 세상 유혹에 미혹되어 버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1903년 초 평양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압록강에서 불법적으로 2,800그루의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왔고, 미국공사 ‘알렌’은 문제를 해결한 후 “그들은 확실히 대규모 목재 사업에 진출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습니다. 이후에도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재정담당 ‘찰스 로버’(Charles Loeber) 선교사는 건축자재를 수입해서 개인적으로 싼값에 팔아 넘겼습니다. 결국 감리교선교부는 미국공사관에 고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1908년 내한하여 1910년 귀국했습니다.)
여기서 자비량 독립선교사가 죽음에 이르렀던 한 가지 사례를 나눕니다. 1893년 10월 조선에 도착한 32세의 맥켄지(W. J. McKenzie) 선교사는 황해도 송천리 소래교회 초대 담임 목사로 사역했습니다. 그는 캐나다 최초 자비량 선교사로, 조선 최초의 ‘자립’교회를 건축하는 송천리 마을에서의 8개월 동안 과로와 심한 열병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이상징후를 보이다가 “한 알의 밀알”(요12:24)로 살다 간, 자신을 교회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합니다(권총 자살). 평소 빈약한 현지 음식만을 먹고 있는 맥켄지 선교사의 건강을 우려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그의 영양보충을 위해서 집에서 만든 빵과 통조림, 과일, 야채, 치즈, 우유, 설탕 등을 보냈으나 그는 ‘조선 방식’으로 살겠다는 의지로 ‘서양 음식’은 먹지 않고 버렸다고 합니다.
한양에서 평양을 거쳐 송천리까지 195km가 더 됩니다. 말에다 짐을 싣고 가는 것만으로도 3~4일이 걸리는 먼 거리에서 늘 자비량 “재정”에 대한 부담과 성급한 현지화, 보살핌없이 혼자 사역하던 어려움의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비보를 접하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도들이 그의 장례를 치른 후였습니다. (아래 글은 6월 22일 맥켄지 선교사의 마지막 일기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몸이 너무나도 쇠약해진 것 같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가 조선인들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뜨거운 햇볕을 받으면서 여행도 감행했고, 밤늦게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까지 밖에서 이야기한 것 등이 나의 실수였다.”
명성황후 주치의이며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아스 홀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는 그때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례 요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열심과 정열에 불타 자신의 몸을 돌볼 줄 모르고 일에만 전념하려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생명력이 약해지면서 기력 또한 약해진다는 사실을 모른다. 성숙한 우리의 신체는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외국인의 조리방식에 따른 조잡한 식사를 받아드리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병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지는데, 그런 상태에서 몸을 여전히 혹사시키면 중노동을 감당치 못하고 쓰러질 것이 뻔한 일이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 둘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필요한 인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건, 보스턴 출신의 야심 찬 무역업자 월터 타운젠트(Walter D. Townsend)와 선교사간의 갈등을 비롯해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그리스도신문] 창간과 자립을 위한 노력 그리고 ‘독립신문’의 몰락,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모한 이탈까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장에서 지켜보고 해결해야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1884년 9월 조선에 도착한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선교사이자 의사, 외교관입니다. 그는 황실병원 ‘제중원’을 세우는 산파역할을 했으며 초대 원장으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를 비롯해서 여러 선교사들이 초기에 안전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제중원’에 역할과 자리를 만들어줬습니다.
‘알렌’은 1897년에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 1901년에는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됐습니다. 그는 선교사 4년, 외교관으로 16년을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행위 자체를 통해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활동이 선교라고 확신”했지만, 당시 다른 많은 선교사는 “복음의 소식이 실제적인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선교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선교사들과 여러가지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사이에 시대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1906년 2월1일,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경성(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합니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당시의 조선과 일본 감리교회의 감독이었던 ‘메리먼 해리스’(Merriman C. Harris)와 만나 ‘정교이원론’(政敎二元論)을 주장하고, 역할 분담론을 제안합니다. 즉, 종교의 영역은 기독교가 맡고 정치, 사회적인 영역은 조선 통감부가 각각 담당하는 것입니다.
“정치상의 일체의 사건은 제가 그것을 담당하지만 금후 조선에서 정신적인 방면의 계몽·교화에 관한 것은 바라건대 당신이 그 책임을 담당해주시오. 그리하여야만 조선 인민을 유도하는 사업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일제치하에서의 조선독립문제로 서양선교사와 조선인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이 있었고, 후에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가 개인구원에 집착하고, 정치와 사회 문제, 곧 사회구원 등에 대해서 다소 무관심 경향을 보이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미국공사 ‘알렌’의 평가에 따르면,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장 열정적이고 열심히 사역하는 선교사 중 한 명이자, 또한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네비우스의 삼자정책을 따르고 있었고 그 첫 번째가 ‘자립’입니다. 그러나 당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우선 경제적 자립 원칙이 ‘토착 교회 유지와 관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교회 중심’ 체제가 되면서 사회봉사나 구제사업,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이 부분은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정경이원론’을 주장하며 기독교로부터 ‘사회적 영역’을 떼어내어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감춰진 의도와도 부합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네비우스 정책은 당시 조선에서 사역중인 다른 선교사들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같은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대구선교부를 관할하던,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소신에 따라 삼자정책 대신에 ‘아담스 복음전도기금’(the Adams Evangelistic Fund)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미국 선교부의 재정이나 예산과 구분되는, 독립된 개인재산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기금은 최초 목적의 선교사 후원 외에도 지역 토착인 전도자들을 지원하여 1930년대 10년 안되는 기간동안 72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대구의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소년학원(Boys’ Academy) 전도악대 후원 등 영남지방 복음화에 사용됐습니다.
‘아담스 복음전도기금’(the Adams Evangelistic Fund)에 대해서 다른 의견으로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역한 네비우스(Nevius)는 이것을 ‘옛 방법’(old system)이라고 했습니다. 네비우스가 비판하는 구 체계는 유급 본토인 사역자(paid native agency)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의 신 체계는 사역 처음부터 독립과 자급(independence and self-reliance from the beginning)을 적용하는 원리입니다. 관련하여,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 초기 선교 15년의 역사를 “자립”의 관점에서 정리한 글을 중국의 선교잡지 The Chinese Recorder지에 발표한바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1899년말에 쓰여진 이 자료는 지금까지 별로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언더우드의 자립정책을 알 수 있는 가장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비우스 역시 자신의 선교구역인 중국 산동성에서 이 계획을 충분히 시행하지 못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같은 선교회 소속의 동료 선교사들이 다른 원칙에 따라 일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의 성공적인 시도는, 그 방법 자체 성격상, 한 선교지부 안에 있는 선교사들이 ‘통일된 일체’가 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일하고 있고, 그 체계의 객관적 교훈을 찾고자 하는 조선에서도 충분한 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감리교 형제들은 우리만큼이나 진지하게 자립하는 교회를 원하고 있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시각이 다르다. 이를 동시에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만일 새 선교지에서 한 마을에 옛 노선대로 일하는 선교회가 있어서, 예배당 건축비의 4/5나 전부를 도와주고, 전도사와 권서 및 전도부인까지 봉급을 주고, 본토인 학교를 지원한다면, 3마일 내지 10마일 떨어진 다른 마을에서 다른 체계를 시행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당도 스스로 짓고, 사역자들의 봉급도 지불하고, 전도사 지원도 담당케 하고, 책도 사게 하고, 학교도 운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분리된 선교회 선교사들이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도 이렇게 많은데, 한 선교회 안에서 다른 노선을 택하고 심지어는 반대하는 상황에서 한두 명이 혹은 여섯 명 정도가 그런 계획을 제대로 시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에서 사도 바울의 모범과 원리를 따르려고 애썼다. 그 원리들은 낡은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철저한 통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확신한다.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 사도가 만일 지금도 살아 있다면, 자신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선교사역을 하면서 지켰던 그 원리들, 곧 영원한 기독교 교회의 기초가 된 그 원리들을 고수하리라고 확신한다.” 언더우드는 1890년 6월, 네비우스 선교사를 처음 만나고 작성한 보고서에서 “네비우스의 견해”를 4가지로 정리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각 사람을 처음 부름 받은 대로 거하게 하여” 각기 자신의 이웃 속에서 자신의 생업을 꾸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고전7:20). 이 말씀은 네비우스 삼자정책의 핵심입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모든 교인이 참여하여 조선 최초 ‘자립’으로 지어진 황해도 ‘소래교회’는 ‘맥켄지’(W. J. McKenzie) 선교사의 서신에 의하면 성황당 터에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축은 80일 동안 주민들의 노력봉사와 현금 17만 냥이 들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 의하면 1889년 환율이 1달러 당 2500~3000냥 정도 됐다고 하니 17만 냥은 당시 미화로 따지면 650달러쯤 될 것 같습니다. 건축비를 낼 수 없는 사람은 목재 등과 같은 건축재료로, 쌀로, 노동력으로 건축을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1895년 7월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에서 가져온 석유램프 5개를 소래교회에 기증했습니다. 처음보는 램프 불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1896년(고종33년) 조선 정부의 예산안은 500만원 정도로 일본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조선 정부의 재정 구조는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조약)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요 수입원은 지세와 해관세(海關稅)였으며, 상공업 부문의 세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 경제가 농촌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립’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여도 보리고개나 흉년이 들면 교회 유지가 어려움을 뜻합니다. (무속과 불교 등 토착종교에서 곡식을 모으는 성미(誠米)제도가 교회에 정착되고, 교역자 사례나 가난한 자 구제를 위해 쓰이게 된 것도 이런 조선 경제 구조의 취약성에서 기인합니다.)
조선 토속신앙은 샤머니즘입니다. 교회가 개척되면서 토착종교와 충돌이 격해집니다. 황해도 봉산군 임동에서는 마을공동제사 비용을 염출하지 않았다고 교인들이 구타당하고, 봉산군 당포교회는 교인들이 마을 공동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배당을 파괴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1894년(고종31년)에 노비제가 폐지됐습니다. 갈 곳 없는 노비들이 ‘머슴’으로 새경을 받으며 뒤섞여 살고 있지만 마을에는 엄연히 신분 서열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방 유지들이 ‘서양귀신(예수)믿는 자를 추방할 것을 결의하여 교회가 정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여 생계를 위협하거나, 어떤 과부는 시댁 식구들로부터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가문에서 축출당하여 구걸을 하게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해져서 ‘자립’(Self-Support)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1885년(고종22년) 조선 도착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네비우스 삼자정책’ 사례들은 1900년 4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에큐메니칼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소개됐습니다(162개 선교위원회 대표 참석). 19세기 선교 역사의 최대 성과의 하나인 “자립 · 자치 · 자전하는 본토 교회”는 이 대회의 중요한 토론 주제였고, [조선 교회의 자립]에 대해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의 글이 발제됐습니다. 10일간 진행된 뉴욕선교대회 참가 회원 명부에 보이는 조선 선교사는 북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부부를 비롯해서 성서공회 빈턴(Charles. C. Vinton) 부부와 제중원 4대 원장을 지낸 에비슨(Oliver R. Avison) 부부 그리고 전주교회를 세운 남장로교 헤리슨(William. B. Harrison) 부부 등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자립선교 전략 모델] 개발을 목적으로 자료를 살펴보던 저에게 특별히 감회가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캄보디아 자립선교 전략 모델] 개발을 목적으로, 새로운 사실과 자료들을 발굴해내던 중에 특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1854년 런던 선교대회(LMC)에서 영국교회선교회(CMS) 총무 헨리 벤(Henry Venn)의 삼자정책 발표부터 1900년 4월 뉴욕 에큐메니칼선교대회(EMC)에서의 [조선 교회의 자립] 발제까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자료들을 찾고, 보게 된 것에 감사가 넘칩니다. 계속해서 ‘헨리 벤’(Henry Venn) 시대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1854년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 CMS) 총무인 헨리 벤(Henry Venn)이 주창한 ‘삼자정책’은 영국 해방노예들의 새로운 정착지인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을 배경으로 합니다. 1780년대 초 영국에는 약 15,000명의 흑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대부분은 직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아프리카 정착에 대한 계획이 공식화되었습니다. 초기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한 자선가이자 독실한 기독교인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와 지지자들은 정부의 ‘흑인빈곤층 구호위원회’에 시에라리온을 이들의 자유를 위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착지로 제안합니다. 이어서 새로운 기독교사회 모델이 될 수 있도록 계획과 규정을 만들고 적극적인 이주를 추진합니다.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와 지지자들은 시에라리온을 새롭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자유의 지방(Province of Freedom)”으로 부르며, 이주를 위한 시에라리온 회사(Sierra Leone Company)를 세워서 선박과 자금을 조달하고, 승선하는 정착민에게 1인당 12파운드를 지불하도록 영국 정부와 재무부를 설득합니다. 이런 노력 끝에 1787년 이주희망자 600명이 등록되고, 1차 원정대로 411명이 구성됩니다. 이들은 런던의 흑인 빈곤층 300명, 영국 노동계급 여성 60명(백인 매춘여성들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착지 건설을 돕기 위한 백인 관리와 성직자, 기술직 장인으로 51명의 남성과 여성 및 어린이입니다.
이주민들은 5개월 간의 우기가 시작되는 1787년 5월에 도착했고, 그랜빌 타운(Granville Town)이라는 이름의 정착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이 첫 번째 정착지는 약 2년 반 동안 지속되었으며, 처음 4개월 동안 말라리아와 풍토병으로 122명이 사망했습니다. 1788년에 시에라리온 템네(Temne)족 추장 나임반나(Naimbana)는 식민지 이주민들에게 이 땅을 주는 조약에 서명했으나, 그는 문맹이었고 영국인이 영토를 영구적으로 점령하려는 의도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789년에 템네 부족의 지역 추장이 토지 임대료 문제로 정착지를 공격했습니다. 이어서 인근에 전초기지를 갖고 있던 노예상인들과 템네족 사이의 분쟁으로 그랜빌 타운은 불타버렸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노예 상인들이 템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이었을 수 있습니다.)
1791년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는 새로운 이주계획을 추진합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영국군으로 참전했던 흑인노예 출신의 토마스 피터스(Thomas Peters)를 내세워, 영국으로부터 ‘자유를 보장’받고 함께 싸웠던 흑인노예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을 이끌어냅니다. 1792년 1월 15일, 영국해군 중위 출신 존 클락슨(John Clarkson)은 캐나다 노바스코샤로 이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 1,196명을 태운 15척의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을 횡단합니다. 50일에 걸친 험난한 항해 끝에 67명의 희생을 치르게 되지만, 마침내 1792년 3월 6일 시에라리온에 도착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새로운 정착지 프리타운(Freetown)이 세워집니다.
이와 같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자유의 지방(Province of Freedom)”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은 1,196명의 흑인노예들이 있고, 50일 이상 항해에 필요한 15척의 함대와 이주민들과 선원들의 식량과 병원선까지, 여기에 더해서 정착지 개척에 필요한 건축자재와 농지 개간을 위한 동식물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이 일은 특히 1787년 ‘노예무역 폐지 협회’를 창설하고 1791년 ‘노예무역 금지 법’을 발의한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영국 런던의 남부 클래팜(Clapham)지역 공동체 출신 복음주의자인 그는 “묶인자(노예)에게 자유(해방)을” 선포하는 길고도 험난한 싸움에 평생을 바칩니다.
우리에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가사로 잘 알려진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는 찬송가 저자인 존 뉴턴(John Newton) 목사의 영적 자서전입니다. 과거에 그는 영국해군 탈영병 출신이며 추악한 욕설로 소문난 노예선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북대서양의 거친 폭풍에 선원들이 바다로 휩쓸려 나가고 선박이 침몰 직전까지 파손되는 극한 상황에서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극적인 생존이후 회심한 그는 목사가 됩니다. 1780년 런던의 성 메리(St. Mary)교회 목사일 때,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그의 간증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들은 힘을 합쳐 대영제국의 노예 무역을 폐지하려는 의회 운동을 이끌면서, 시에라리온으로 흑인노예들을 이주시키는 거대한 계획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어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시에라리온 경영권을 핸리 손튼(Henry Thornton)에게 맡깁니다. 시에라리온의 토지와 재산권은 1791년 설립된 시에라리온 회사(Sierra Leone Company)에 있으며, 은행가인 손튼은 회사 설립때부터 재정적 두뇌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가장 잘 아는 그를 통해서 시에라리온이 최초의 목적대로 해방된 노예들의 정착지로 약속된 땅을 배분해주고, 이어서 노예제도에 오염되지 않은 농산업과 무역 활동으로 수익을 내면서, 아프리카에 기독교 문명의 축복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시 모델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이 당시 구성된 회사 이사진을 보면 복음주의 개혁가들인 클래팜 종파(Clapham Sect) 핵심 멤버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여기서 잠시 출생연도 중심으로 “클래팜 종파(Clapham Sect)”멤버들을 살펴보면, 영국 동인도회사 회장 찰스 그랜트(Charles Grant 1746-1823), 인도의 총독 테인마우스(Teignmouth 1751-1834), 하원의원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1756-1835), 저명한 변호사 제임스 스티븐(James Stephen 1758-1832),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현대 중앙은행의 아버지로 불리는 은행가 헨리 손튼(Henry Thornton 1760-1815), 회계사이자 노예무역폐지 운동가 재커리 멕콜레이(Zachary Macaulay, 1768-1838), 그리고 이들의 영적지도자인 클래팜의 주임 사제 존 벤(John Venn, 1759-1813)과 그의 아들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 중에 일부는 시에라리온 회사(SLC)이사로 활동하며, 이후 ‘삼자정책’으로 알려지게 될 ‘헨리 벤’은 1799년에 설립되는 영국교회선교협의회 CMS 종신 총무가 됩니다.
1792년 1월, 한 겨울의 대서양을 건너온 흑인노예들은 시에라리온의 초대 주지사로 백인 선장 존 클락스(John Clarkson)을 추대했습니다. 그는 28세의 나이에 15척 함대를 지휘하여 50일간의 험난한 항해를 이끌었고, 흑인 정착민들은 그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모세’로 불렀습니다. 존 클락스는 12세의 영국해군 소년병 출신으로 19세에 중위로 임관한 경력이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가 이처럼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섭리 가운데 ‘노예무역 폐지 실행위원회’ 구성원으로 시에라리온 회사를 함께 설립한 그의 형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목사와 윌리엄 월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1792년 8월 24일, 불타버렸던 그랜빌 타운(Granville Town) 옛 정착민들이 새로운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에 통합됐습니다. (그랜빌 타운 정착민들은 말라리아와 풍토병으로 100명이 넘게 사망했고, 일부는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로 팔렸으며 살아남은 나머지는 흑인남성 39명, 흑인여성 19명과 백인여성 6명으로 모두 64명에 불과했습니다.) 프리타운은 1794년 9월 영국과 프랑스 전쟁으로 큰 피해를 겪기도 했지만, 다시 재건되어 1798년에는 미국 남부의 건축 양식과 유사한 주택이 400채 가까이 들어서며 도시의 면모를 갖춥니다. 이듬 해 1799년 영국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클래팜 종파(Clapham Sect)” 복음주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 CMS)’ 가 설립됩니다.
1799년 설립된 영국 교회선교협의회(CMS)는 최초의 해외 선교기지로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을 선정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선되는 결정으로, 이미 ‘노예무역 폐지 협회’를 창설하고 ‘노예무역금지법’을 발의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중심으로 해방노예 정착지가 개척되어 있고, 자립에 필요한 경제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시에라리온 회사(SLC)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MS는 서아프리카 선교부 설립을 위해서 1804년에 독일 루터교 출신의 선교사 멜키오르 레너(Melchior Renner)와 피터 하트비히(Peter Hartwig)를 파송합니다.
1807년 3월 29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주도해왔던 ‘노예무역금지법(Slave Trade Act of 1807)’이 마침내 통과되어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됐습니다. 이에 따라 시에라리온에서 활동하던 영국 해군 서아프리카 전대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을 순찰하며 노예선을 요격하고 나포하여 흑인노예들을 구출합니다. 불법 노예들은 프리타운으로 이송되고 법 절차에 따라 정착민 가정과 내륙의 사업장에 ‘비자유 노동 견습생’(unfree labor apprenticeships)으로 장기간 위탁됩니다. (당시에 견습이란, 해방노예들이 다시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거래되는 것을 막으면서, 농업과 상업 등 직업적 훈련을 통해 자립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1792년 1월, 한 겨울의 대서양을 15척의 함선으로 건너온 흑인노예들이 시에라리온을 자유의 정착지로 개척하고, 1799년 영국에서는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 CMS)’가 설립됩니다. 1803년에 ‘노예무역금지법’이 발효되더니 1804년 3월에는 성서의 ‘폭넓은 유통과 사용’을 위한 영국해외성서선교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 BFBS)가, 같은 해 CMS 서아프리카 선교기지가 프리타운에 세워집니다. 경이롭기까지 한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람’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있습니다. 당시 시에라리온 사람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공포의 노예선에서 구출되어 해방된 노예들을 “윌리포스 검둥이(Willyfoss niggers)”라고 불렀습니다. 비하적인 느낌보다는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한 경외감과 애정이 느껴집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1807년 4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실행 가능하고 문명화된 피난처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아프리카 기관(African Institute)을 설립합니다. 1797년에 세웠던 시에라리온 회사(Sierra Leone Company)의 역할은 먼저 전도를 통해 원주민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한 반면, 아프리카 기관(African Institute)은 먼저 프리타운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아프리카 기관의 지도자는 노예무역 폐지법을 초안했던 제임스 스티븐(James Stephen)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로, 조지 3세 왕의 조카인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이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성직자와 귀족들도 합류했습니다.)
이때 기록을 살펴보면, 1791년 설립된 시에라리온 회사(Sierra Leone Company)의 전체 자본금은 24만 파운드였습니다. 당시 화폐기준으로 108만달러(1파운드는 4.44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5억1928만 파운드입니다. (1800년 인플레이션 36.36%, 2024년 인플레이션 3.90%) 이것은 약 32억달러에 해당하며, 한화 4216억원이 됩니다. (1달러 1320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시에라리온 개척과 흑인노예들의 자유와 복음전파를 위해서 이 모든 비용을 주도적으로 조달했으며, 대부분 소진된 상태에서 회사의 권리는 1807년 새롭게 설립한 아프리카 기관(African Institute)으로 승계되었습니다.
1808년에 시에라리온은 영국 국왕 식민지(Crown Colony)가 됩니다. 그간 시에라리온 지역에서 유일하게 성행한 산업은 노예무역이었고, 이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영국해군 전대 사령부와 해군성 법원 등이 프리타운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천혜의 항구인 이곳을 거점으로 영국 상인들은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 내륙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척한 시에라리온이 1799년이후 헌법상의 불확실한 지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회사가 부담하던 개척지 운영비의 일부를 영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결국 1808년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 회사(SLC)로부터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맡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시에라리온은 노예제도 없는 제국을 구상하려는 영국의 ‘강력한 실험’의 시험장이 됐고, 견습제도는 이러한 공식화의 핵심 요소를 형성했습니다. 노예선에서 구출된 아프리카인(해방노예)들이 프리타운에 상륙하고 5년 이내에 견습 제도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감리교 선교사인 토마스 코크(Thomas Coke)는 1812년에 “정착지 전체에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이러한 ‘비자유 노동 견습생’(unfree labor apprenticeships)이 한 명 이상 없는 가족은 거의 없으며 일부는 20명이나 됩니다”라고 보고서에 썼습니다. 1813년 5월 영국 교회선교회(CMS)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프리타운 인구 1,404명(성인 거주자 600명 포함) 중 남성 견습생은 220명, 여성 견습생은 159명이었습니다.
시에라리온의 변화속에 새로운 인구유입이 시작됩니다. 1810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다인종가정(혼혈) 출신인 폴 쿠프(Paul Cuffe)는 노예제도 폐지론자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고래잡이 선장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기관’ 임원들을 만나기 위해서 영국도 방문했으며, 2차에 걸친 시에라리온 방문을 통해 정착민을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현지에서 수출 가능한 농업, 상품의 생산, 포경산업의 3가지를 제안합니다. 1815년 폴 쿠프는 38명의 해방노예로 구성된 첫 번째 그룹을 미국에서 시에라리온으로 데려왔습니다. (성인 18명과 어린이 20명으로 연령은 8개월에서 60세까지였습니다. 이들은 1년치 식량과 도끼, 괭이, 쟁기, 마차, 제재소 건설에 필요한 부품 등의 물품을 가져왔습니다.)
1814년부터 1824년까지 시에라리온 주지사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찰스 맥카시(Sir Charles MacCarthy)장군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특파원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식민지의 복지에 큰 관심을 갖고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많은 정착지와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프리타운에는 12개 정착지 마을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선교협회(CMS)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부모가 노예로 사로잡혀간 원주민 아이들을 교육하도록 주선하고 지원했습니다.
1801년에서 1864년 사이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송된 2,201명의 노예 중 성인 남성 포로의 42.5%, 여성 16.9%, 소년 25.2%, 소녀 15.4%를 차지했다고 추정합니다. (또 다른 기록의 노예선에는 노예들의 평균 연령이 18.83세였으며 대서양을 건너 살아서 상륙한 사람의 39.4%는 14세 이하였습니다.) 당시 영국 내에서는 ‘아동’이라는 용어의 사용과 ‘어린 시절’에 대한 정의에 일관성이 없었고, 노예상인들은 나이와 키를 기준으로 아이들을 식별했습니다. 어린이의 기준 키는 4피트 4인치(132cm)인 경우가 많았으며 14세 미만을 어린이로 정의했습니다. (영국의 견습 제도는 14세에 시작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노예 분류는 왕립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n Company)를 표준으로 했습니다. RAC는 1660년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형제였던 요크 공작이 설립을 주도한 국영 무역회사입니다. 국왕은 아프리카와의 모든 영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수출되는 모든 상품에 대해 10%의 세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영국 상인에게 개방했습니다. RAC의 가장 큰 수출 상품은 노예였으며, 1672년에서 1731년 사이에 187,697명을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식민지로 수송했습니다. (이송 도중에 38,497명 사망) 회사의 이니셜인 RAC를 노예들의 가슴에 새겨서 상품화 했고, 어린이는 14세 미만으로 정의했습니다.
당시 열정적인 맥카시(MacCarthy) 주지사는 독자적인 ‘본당 계획’을 수립하고 교회선교협회(CMS)를 시에라리온 반도 전역에 새로 설립되는 본당의 관리자로 만들었습니다. 이 본당은 마을에서 관리되고 CMS선교감독관이 이끌었습니다. 상주하는 CMS 선교사는 해방된 노예들의 견습 과정을 감독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이에 따른 식민정부와 CMS 사이의 합의는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15년 8월 15일, 맥카시 주지사는 영국 CMS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냅니다. “정부는 협회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장 큰 기쁨으로 노예에서 해방된 모든 어린이들을 선교사들의 손에 넘겨줄 것입니다.” (CMS와의 이 특별한 계약은 1816년에서 1826년, 그가 아샨티(Ashanti)전투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10년동안 지속됐습니다.)
1821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공급되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을 여전히 허용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해 3월, 서아프리카 풀라니(Fulani)족 노예사냥꾼과 “요루바 이슬람교도(Yoruba Mohammedans)”들의 공격으로 마을 전체 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혔던 소년이 있습니다. 당시 12살이었던 아자이(Ajayi)는 담배 잎과 영국산 포도주를 대가로 ‘이제부 상인(Ijebu trader)’에게 넘겨졌고, 다시 ‘라고스 노예 시장(Lagos slave market)’에서 포르투갈 노예상인에게 팔렸습니다. 포르투칼 상인들은 그를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배를 태워 바다로 떠났습니다. 노예선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던 중에 아프리카 해안을 순찰하던 영국 왕립해군 미르미돈(Myrmidon)호에게 발견됩니다.
빠른 속도의 포르투갈 스쿠너(schooner) 노예선은 도주하던 중에 영국 왕립해군 미르미돈(Myrmidon)호 포격으로 파괴됩니다. 탑승한 노예 189명 중 102명이 난파선에서 사망했고 표류 중에 구조된 87명중에 12살 소년 아자이(Ajayi)가 있었습니다. 극심한 공포속에서 구출된 노예 소년은 영국 해군 헨리 리크(Henry Leeke) 선장과 승무원들의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에라리온에 상륙했을 때, 노예 취급을 받기보다는 자유와 친절을 받았습니다. 아자이(Ajayi)는 프리타운 교회선교협회(CMS)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짧은 기간에 배운 영어로 더듬거리며 신약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에 대한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1821년, 공포의 난파선에서 구출되고 “윌리포스 검둥이(Willyfoss niggers)”로 불렸던 12세 아자이(Ajayi)는 프리타운 교회선교협회(CMS) 학교에서 자립에 필요한 전문 기술과 영어를 배웠습니다. 당시 CMS에서는 전통적인 직조 및 농업 기술에 목공 기술 등을 함께 가르쳤는데, ‘아자이’는 목수였던 시에라리온의 주교로부터 목공 기술을 집중적으로 배웠습니다. 소년은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뛰어난 지적 자질이 있어서 시에라리온에 도착한지 6개월 만에 신약성경을 읽고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 정착민에게 ‘비자유 노동 견습생’(unfree labor apprenticeships)으로 위탁되는 해방노예에게는 식사(식량)만이 제공됩니다. 그럼에도 ‘아자이’는 한 달에 7.5펜스를 받는 지역 학교의 학생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24년 아자이(Ajayi)는 15세가 됐습니다. 노예사냥꾼 풀라니(Fulani)족과 “요루바 이슬람교도(Yoruba Mohammedans)”들에게 포로 되어 담배 잎과 포도주 몇 병에 팔렸던 소년은 노예에서 해방된 지 3년쯤 되었을 때, 성경에 대해서 점차 알아가고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또 다른 더 나쁜 노예 상태, 즉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말로 자신이 인간의 노예 생활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 생활에서도 구원받았다고 언급했습니다. ‘아자이’는 자신을 위해 자유를 쟁취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삶을 그분의 봉사에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노예폐지법의 27개 조항 중에 ‘해당 아프리카 원주민(흑인노예)을 수용, 보호 및 제공’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법은 해방된 아프리카인(흑인노예)들이 군대에 입대하거나 ’14년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 성년 여부에 관계없이 ‘비자유 노동 견습생’(unfree labor apprenticeships)으로 구속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에라리온의 해방된 아프리카노예 등록부(Liberated African Registers)에 따르면 이미 성인이거나 (이제 14세 이상이 된) 101명의 견습생이 영국 해군, 왕립 아프리카 군단 또는 서인도 연대로 배치됐습니다.
또는 많은 견습생들이 정착지의 지명된 위탁 가정을 떠나 ‘적법한 생계 수단 없이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다가’ 붙잡혀서 가혹한 처벌을 받거나, 노예사냥꾼들에게 포로가 되어 되팔려 가기도 합니다. (CMS 존 윅스(John Weeks) 선교사는 1831년 1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설립될 마을에서 해방된 아프리카 견습생의 수를 조사한 결과 그들 중 상당수가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로 노예로 되팔렸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아자이(Ajayi)는 16세가 됩니다. 1825년 12월 11일 존 라반(John Raban)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CMS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무엘 크라우더(Samuel Crowther)의 이름을 따서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Samuel Ajayi Crowther)’로 자신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어서 1826년 17세에 영국으로 보내져서 1년동안 런던 이슬링턴(Islington)의 세인트메리교회(St Mary’s Church) 교회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827년 18세에 시에라리온 프리타운으로 돌아옵니다. 이처럼 ‘아자이’는 “윌리포스 검둥이(Willyfoss niggers)”로 불리던 동 시대의 해방노예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8세의 ‘아자이’가 영국에서 돌아온 1827년 2월에는 서아프리카 최초로 포라베이 대학(Fourah Bay College)이 프리타운에 개교하고 1828년 ‘아자이’는 최초의 학생이 됐습니다. (이 대학은 아프리카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교회선교협회(CMS)가 시에라리온 주지사 찰스 맥카시(Charles MacCarthy)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습니다.) 영국령 서아프리카 최초의 서구식 대학으로 고등교육을 원하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인, 가나인, 코트디부아르인 등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곳이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프리타운과 주변 지역에 우수한 학교들이 많아지면서 ‘아프리카의 아테네’로 알려지게 됩니다. ‘아자이’는 학업을 마친 후 대학의 교사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으며, 더불어 노예선에서 “해방된 아프리카인”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마을의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교장은 교리교사이며 전도자입니다.
1827년 영국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 의해 클래팜 종파(Clapham Sect)의 젊은 지도자 헨리 벤(Henry Venn)이 성공회 교구 킹스턴 어폰 헐(Kingston upon Hull) 드라이풀(Drypool)의 영구 큐레이터로 임명됩니다. 헐(Hull)은 어업과 포경 중심지이자 무역센터가 있는 산업도시로 “마른 풀장”을 의미하는 드라이풀(Drypool) 교구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신앙과 정치적 활동 배경이 되는 지역입니다. (그는 당시 노예제도 폐지를 이끌면서 이와 연계하여 이후에 교회선교협회(CMS) 종신 총무로 섬기게 될 31세의 헨리 벤을 지명해서 ‘보살피고 돌보는’ 큐레이터로 세운 것입니다.)
1831년 12월 27일 자메이카 영국식민지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832년 1월 첫째 주까지 11일만에 노예들의 지도자이며 침례교 설교자인 사무엘 샤프(Samuel Sharpe)를 포함하여 진압군에 대항했던 200명이 넘는 반란군과 300명이상의 남녀 노예들이 처형됐습니다. (1800년 시에라리온에서도 해방노예들에게 토지사용료를 징수하면서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영국에서는 노예무역금지법(1807) 이후 오랫동안 끌어왔던 노예제도폐지법(1833)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듬 해 대영제국 전역에서 폐지됩니다(1834). 이 같은 소식을 며칠 앞두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74세의 나이로 평소 앓아오던 지병이 악화되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1834년 8월 1일, 영국과 모든 식민지에서 인간을 재산으로 소유, 구매, 판매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노예제도폐지법이 실행되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행동하는 양심”은 세계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에게는 영감과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834년 프랑스에서 노예폐지협회가 결성되었으며, 1848년에 노예 완전해방의 결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에서도 1833년에 노예제도반대협회가 생겼고, 1863년 대통령 A.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이어졌으며, 브라질만은 예외적으로 1888년에 와서야 노예해방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렇듯 노예무역금지와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나라들이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처럼 여전히 서아프리카 해역과 중남미 지역에서 노예무역이 번창하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들 국가의 노예무역선들은 영국 해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의 국기를 계양하고 항해했습니다. 영국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불법화한 1807년부터 해군을 이용해 서아프리카 해안을 순찰했습니다. 180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서아프리카 함대는 1,600척의 노예선을 포획하고 15만명의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시에라리온 영해의 노예선에 억류되었던 노예들은 프리타운에서 풀려났으며 처음에는 ‘포로된 흑인’, ‘재포로’ 또는 ‘해방된 아프리카인’으로 불렸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의 백인 노예상인들은 주로 해안 가까이 전진기지를 만들고 노예사냥꾼들을 고용하여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요루바 이슬람교도(Yoruba Mohammedans)”들과 또 다른 아프리카 추장들은 적대적 관계인 부족을 습격하여 잡은 포로를 노예상인들에게 팔게 되면서, 노예상인들은 이들 부족 지도자들과 경제적 동맹을 맺었습니다. (1787년 5월 영국에서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던 그랜빌 타운(Granville Town)의 해방노예 상당수도 이런 과정에서 포로가 되어 또 다시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무역금지(1807)와 노예제도 폐지(1833)의 큰 뜻을 이루고 타계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있습니다. 이어서 사회개혁가인 하원의원 토마스 포웰 벅스톤(Sir Thomas Fowell Buxton)은 “합법적인 무역”(상품)과 복음 전파에 의한 기독교의 확산을 통해 노예 공급은 파괴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노예 생산의 근원지인 아프리카 지역 족장 지도자들과 영국 정부가 나서서 조약을 맺을 것을 촉구합니다. “성경과 쟁기(The Bible and Plough)”로 정의된 그의 주장은 1841년 영국 국회의 지원을 받게 되고 ‘아프리카 식민 탐험(African Colonization Expedition)’으로 알려진 나이지리아 ‘니제르 원정대’(Niger expedition of 1841)로 구체화됩니다.
이와 같은 시기인 1841년에 클래팜 종파(Clapham Sect)의 젊은 지도자 45세의 헨리 벤(Henry Venn)이 영국 교회선교협회(CMS) 총무로 선교사역에 헌신합니다.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내륙의 강을 따라 최초로 올라가는 ‘니제르 원정대’는 400톤급 증기선 3척과 1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에 시에라리온 교회선교협회(CMS) 선교사 제임스 숀(James F. Schön) 목사와 원주민 교리교사 ‘사무엘 아자이 크라우더(Samuel Ajayi Crowther)’가 현지에서 부족 통역들을 선발하여 원정대에 동행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여기서 원주민 교리교사는 20년 전, 노예무역 난파선에서 구출되어 프리타운 CMS에서 성장한 바로 그 노예소년 ‘아자이’입니다.)
니제르 원정 목표는 원주민과 조약을 맺고, 경제적 이익을 줄 수 있는 상업을 활성화시키고, 농업 기술을 가르치며, 기독교를 장려하여 노예 무역을 근절시키는 것입니다. 임무를 수행할 군인들과 전문 인력이 승선한 3척의 증기선이 1841년 8월 서아프리카에 도착했습니다. 선교 사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계획된 로코자(Lokoja)에 “성경과 쟁기(The Bible and Plough)”의 모델 농장을 설립하기 위한 토지를 구입했고, 이어서 원주민 부족과 일부 협약이 체결되던 중이었지만 모든 일정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원정대 150명중에 발열환자가 130명, 유럽인 45명중에서 4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면서 1841년 원정은 절망적인 실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니제르 원정 : 1841년 5월 12일 영국 플리머스 출항 ~ 11월 19일 귀항 (전체 6개월) 왕복 항해 5개월, 현지 사역 1개월
원정대의 높은 사망률로 인해 그 성과가 가려졌지만, 니제르 강을 따라 올라오는 동안 ‘아보(Aboh)’와 ‘이다(Iddah)’의 통치자들과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조약이 협상됐습니다. 그들은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허가했으며 왕궁에서 CMS 선교사들은 방문 목적과 복음 메시지를 들려주고 마지막에 영어 성경과 아랍어 성경 두 권을 선물했습니다. 아보 왕은 읽거나 쓸 줄 몰랐지만 통역사 역할을 한 해방노예 시몬 조나스(Simon Jonas)가 산상수훈을 왕에게 낭독했을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 생각에 백인이 읽고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흑인(그것도 노예출신이) 그렇게 하자 감동한 왕이 요청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몬 조나스는 ‘아보’에 남겨져 기록된 말씀의 신비를 설명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나머지 원정대는 ‘이다’로 이동했습니다.
불행하게도 1841년 원정대원들의 선교 활동과 니제르 강변의 부족 공동체 사이에 체결된 조약은 영국이 약속과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소멸되었습니다. 당시 원정대에는 군의관도 있었으나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quinine)이 발견되기 전이었고, 원정 실패 후 13년 동안 영국은 그 지역으로는 접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반동의 시기에 역사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현재의 사건 너머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교회선교협회(CMS) 총무 헨리 벤(Henry Venn) 목사였습니다. 그는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직계이며, 사회개혁가 토마스 포웰 벅스톤(Sir Thomas Fowell Buxton)의 “성경과 쟁기(The Bible and Plough)” 실천론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1841년 영국 해군은 니제르 원정을 위해서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 내수면의 얕은 강으로 항해할 수 있는 3척의 증기선을 특별히 건조했습니다. 그 이름을 살펴보면 앨버트(Albert)호 457톤, 윌버포스(Wilberforce)호 457톤, 수단(Sudan)호 249톤입니다. 두 번째 함정이 “윌리엄 윌버포스”에서 왔음을 알 수 있듯이 그 이름은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제도 폐지를 상징합니다. (1856년에 설립된 미국 오하이오 주 윌버포스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이 대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최초로 소유한 대학이었으며 역사적으로 흑인대학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윌버포스 식민지(Wilberforce Colony)는 흑인 개혁가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거주했습니다.)
니제르 원정에서 풍토병에 면역력이 없던 유럽인 45명 중 4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158명의 아프리카인 중 발열 사례는 11건, 사망 사례는 1건에 불과했습니다. 시에라리온 제임스 숀(James F. Schön) 선교사는 이 경험과 ‘아보(Aboh)’ 왕의 성경 선생이 된 해방노예 ‘시몬 조나스(Simon Jonas)’의 사례를 영국 교회선교협회(CMS)에 보고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을 그들 민족의 복음 전도에 사용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정은 실패했지만 위기상황을 탁월하게 대처했던 원주민 교리교사 ‘아자이(Samuel Ajayi Crowther)’의 안수를 준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CMS는 현지 책임 선교사의 보고서와 ‘아자이’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훈련과 안수를 위해 그를 영국으로 초대했습니다.
노예무역과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그가 세운 교회선교협회 CMS 총무 헨리 벤(Henry Venn) 그리고 12세 흑인노예소년이었던 ‘아자이(Samuel Ajayi Crowther)’로 이어지는 시에라리온의 새로운 선교역사가 이제 시작됩니다.
1841년 영국에서 출발한 150명의 니제르 원정대는 현지에서 합류한 인원까지 159명으로 늘었습니다. 그 중에서 4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1842년 영국으로 돌아오던 인원중에 15명이 추가되어 전체 사망자는 55명에 이르렀습니다. 원정대의 1/3이 희생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실패한 니제르 원정대로 인해 능력을 인정받은 ‘아자이’는 1842년 10월 영국으로 오게 되고, 런던 북부 이슬링턴(Islington)의 교회선교협회 훈련대학(Church Missionary Society Training College)에서 1년간 훈련을 받습니다. (그는 1828년 CMS가 세운 시에라리온 포라베이 대학(Fourah Bay College) 첫 번째 졸업생입니다.) 이어서 1843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성공회 사역에서 없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842년 아프리카 흑인노예 출신 ‘아자이’가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기는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 여왕이 재위한지 5년째 되던 해입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18세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여 64년간 재위합니다. 이때를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통칭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 최전성기 때입니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것은 영국의 힘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대였으며, 정치와 경제, 문학과 언어, 과학·인문학·산업·패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표준처럼 자리 잡았던 시대였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의 황금시대로 영국 인종차별의 황금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앵글로색슨(Anglo-Saxons) 우월주의에 의한 인종 편견이 심했습니다. “흑인에 대한 영국의 태도, 1850-1870 (British attitudes to the Negro, 1850-1870)” 논문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흑인은 본질적으로 열등하며 영원히 백인에게 복종해야 한다…(중략) 흑인을 자신의 우월하고 거의 귀족적인 앵글로색슨 종족보다 영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보는 새로운 시각에 의해…(중략) 영국에서는 흑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던 빅토리아 시대 중반 사람들은 아프리카나 신세계의 먼 현실보다는 영국 사회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흑인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영국에서 흑인을 만났을 때에도 영국인들은 이 어두운 낯선 사람들의 신체적 특성보다는 사회적 특성에 반응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흑인=노예”에 대한 시대적 인식입니다. 1780년 영국 하원의원은 166명이었고(30세 미만 34%), 이들 중에 74명의 의원이 서인도제도 영국 식민지의 설탕 농장주이거나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무상의 노동력(흑인노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했습니다. 아이작 가스코인(Isaac Gascoyne)은 1806년 6월 10일 하원에서 노예제도가 레위기 25:44-46에 의해 승인되었다고 주장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807년 2월 23일에 조지 히버트(George Hibbert)는 구약성서와 빌레몬서에 기초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807년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에는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을 구별하여 노예무역이 성경에서 금지된 것임을 인정했으나(특히 출애굽기 21:6, 신명기 24:7, 딤전 1:1, 9-10), 계속해서 노예제도는 허용한다고 주장합니다(레위기 25:44-46).
1910년 세계선교대회(1910 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6월 14일부터 6월 23일까지 영연방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열렸습니다. 이곳에 모인 1200명의 선교 관련 대표자와 선교사들 가운데 아프리카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슬람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아프리카 선교의 긴급성’이 보고되었고, 모든 ‘비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선교’ 계획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대륙의 교회 성장의 대부분 영역에서 대다수의 선교사가 흑인이라는 점이 간과되거나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1906년 교회선교협회(CMS)에는 당시 ‘본토인’으로 알려진 선교사가 8,850명 있었고 ‘유럽 선교사’는 975명에 불과합니다.) 여기서도 잠재된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위험성과 왜 아프리카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 불렀는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는 종교적인 요소와도 결합하는데, 이들은 신이 백인에게 우월한 권리를 부여했다는 식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합니다. 아자이(Ajayi) 또한 이 같은 차별을 CMS 내부에서 겪습니다. 특히 말라리아 치료용 퀴닌(quinine)의 발견으로 백인도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더 이상 현지 원주민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백인우월주의가 더욱 드러납니다. 향후 ‘아자이’와 함께 사역하며 요루바 선교부를 이끌어가게 될 CMS 로빈슨(J A Robinson) 목사의 리더십 관점은 “흑인종은 통치 능력의 모든 은사가 부족하다”거나, 헨리 타운센드(Henry Townsend) 목사는 “신이 ‘백인’에게 재능을 주셨다”는 끔찍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흑인노예 출신 ‘아자이’에 대한 이들의 편견은 CMS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말, 노예에 대한 자유는 1838년에 허용되었지만 인종에 대한 영국인들의 태도는 여전히 제국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지배”한다는 개념과 남아시아, 호주와 뉴질랜드 원주민 등 그곳 식민지 사람들은 2등 시민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물며 ‘아자이(Ajayi)’는 서아프리카 요루바 부족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여기에 종교식민주의까지 더해지면서 당시 백인들 사이에서는 그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흑인 영국인(black Englishmen)”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아프리카 기독교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CMS의 진보적인 총무 헨리 벤(Henry Ven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자이’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총명하고 믿음직하며, 말투가 부드럽고 헌신적인 그는 매너 면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고 외모 면에서는 아프리카 사람이었습니다.” (Intelligent and reliable, soft-spoken and devoted, he was Victorian in his manners and African in his outlook.) 더불어 이때까지 아프리카 선교지의 공통된 문제점, 헨리 벤은 그것을 “자립(self-supporting),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extending)”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원주민 목사(신부)와 주교가 아프리카 교회를 감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와 같은 플랜에서 ‘아자이’는 “외국의 원조나 감독으로부터 독립된” 아프리카 원주민에 의한 토착교회를 창설하려는 CMS 의도에 이상적인 후보자였습니다.
헨리 벤(Henry Venn)은 당시 CMS 본부 총무로 선교지 상황에 대한 그의 판단과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선교지 교회가 자립(self-supporting),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extending)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의 생각은 교회선교협회(CMS)의 지지를 받았고, 서아프리카 독립적인 시에라리온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실천하게 됩니다. 1841년 “성경과 쟁기(The “Bible and Plough)”프로젝트에서 출발한 헨리 벤의 삼자정책의 핵심은 “성경번역(Bible translation)과 ETT(교육Education +기술 Technology +무역 Trade)”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지와 계획들을 어떻게 전개해나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월 23일(토)~4월 2일(화)까지 10일 동안 잠시 글쓰기를 쉽니다. 이후 시에라리온 소식 계속 전하겠습니다.
4월 12일(금)까지… 연장해서 글쓰기를 쉬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어서 ‘자립선교’모델 개발에 관한 소식 전하겠습니다.
자립선교방정식
Ss=(Bb)X(E+M+T+B)
캄보디아 복음화율 1% 대비 시에라리온 복음화율 21%